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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짇날 - 화전놀이
삼짇날 - 화전놀이
삼짇날 - 화전놀이

화전놀이는 꽃피는 3월이 오면 행해지는 부녀자들의 대표적인 놀이로, 삼짇날의 풍속이라고 알고 있으나 꼭 그날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대개 마을 부녀자들의 회의를 통해 좋은 날을 택일해 행해진다. 풍산 류씨 동성마을인 하회마을의 화전놀이는 대개 풍산 류씨 문중 사람만이 참여하여 행해졌으며, 1980년대에 와서 그 전승이 중단되었다.

1) 화전놀이의 기원 및 유래

매년 봄이 오면 마을 사람들이 산이나 경치 좋은 곳으로 놀러가는데 이를 화전놀이 또는 화류놀이, 꽃놀이 등으로 부른다. 화전놀이는 신라시대에도 존재했는데 이는 궁인들이 봄에 꽃을 꺾은 데서 비롯한 ‘화절현(花折峴)’이라는 고개의 유래와 김유신의 맏딸 재매부인을 청연이라는 못 위의 골짜기에 묻었는데, 봄마다 집안의 여성들이 꽃과 송화(松花)가 만발한 그곳에 모여서 잔치를 벌였다는 ‘재매곡(財買谷)’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또한 ‘귀가(貴家)의 부인들도 또한 많이 본받아서 장막을 크게 설치하고는 며느리들을 다 모아서 호세(豪勢)와 사치를 다투어 준비하는 것이 매우 극진하였다. 참꽃이 필 때에 더욱 자주 그러하니 전화음(煎花飮)이라고 하였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조선 후기 시인들의 시와 부녀자들의 ‘화전가’를 통해 조선시대와 근대에도 화전놀이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2) 풍산 류씨 문중의 부녀자들만 참여하는 화전놀이

풍산 류씨 동성마을인 하회마을의 여성들은 무더운 여름에도 속바지와 속치마를 겹겹이 껴입고 버선을 신어야 했고 이웃집이라 하더라도 쉽게 다녀올 수 없으며 항상 시부모와 남편에게 순종하며 살아야 했다. 이렇듯 엄격한 규율과 예절에서 해방될 수 있는 날은 바로 화전놀이 가는 날이었다. 그래서 화전 가는 날은 마을 내 여성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었다. 하회마을 내에서 화전놀이에 참여할 수 있는 여성들은 대개 풍산 류씨 문중의 여성이었다. 타성의 여성들이 참여할 수 없다는 규칙이나 규정은 없지만 대개 타성들은 하회마을에서 풍산 류씨들의 농토를 소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타성의 여성들은 화전놀이를 함께 가지 않았다.

3) 여성들만의 놀이마당

화전놀이의 과정은 우선 문중의 몇몇 여성들이 “화전 언제 갈라노” 하고 화전놀이를 가자는 제안을 하면서 시작된다. 화전놀이는 풍산 류씨 문중의 딸들이 주도하여 행해지며 화전가는 날은 제사와 같이 집안의 대소사를 피해 정하는데 이는 문중 내 많은 여성들이 화전놀이를 함께 하여 정을 돈독히 하고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게 하기 위함이다.

날이 정해지면 문중 내 부녀자들에게 이를 알리고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금액을 걷는데 이 때 돈 대신 쌀을 걷기도 하고, 음식을 만들어 가기도 하며, 때로는 종부가 그 금액을 지불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마을과 달리 화전놀이를 위한 화전계(花煎契)는 존재하지 않았다.

화전놀이를 갈 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좋고 예쁜 한복을 입고 노리개로장식하는 등 한껏 멋을 부리는데 이는 함께 가는 여성들과 옷맵시를 겨루기 위함이었다.

화전놀이를 가는 장소는 대개 부용대와 팔선대, 그리고 병산서원이었다. 부용대는 만송정 맞은편에 위치해 있으며 부용대에서 내려다보는 하회마을의 전경은 일품이다. 여성들은 겸암정사와 옥연정사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고 놀았다. 그곳에 가려면 화천(花川)을 건너가야 했는데 마을 내 사공이 화전놀이를 가는 여성들을 나룻배로 태워 강을 건너게 해주었다. 또한 바위 위에 넓은 공터가 있는 팔선대는 화전가를 지어 부르며 놀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병산서원 역시 경치가 매우 뛰어나서 화전놀이의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다.

화전놀이를 할 때는 행랑채에 사는 일꾼을 2~3명 데리고 가는데 이들이 화전에 필요한 조리기구와 놀이기구를 준비하여 짊어지고 간다. 점심은 일반적으로 겸암정사나 옥연정사에서 먹는데 음식은 정사를 지키는 고지기가 준비한다. 대개 비빔밥을 많이 먹었으며 점심을 먹은 뒤에는 참꽃을 이용해 화전 혹은 꽃전이라 불리는 전을 구워 먹었다. 화전을 굽기 위해서 먼저 불을 지핀 뒤 솥뚜껑을 뒤집어 불 위에 올린다. 찹쌀가루에 반죽을 하여 솥뚜껑 위에 기름을 두르고 국자로 반죽을 떠서 둥글게 부어 모양을 만든 다음 깨끗이 씻은 참꽃을 여러 개 올려 노릇노릇하게 굽는다. 이렇게 만든 화전을 찍어 먹기 위해 충효당 종부는 꿀을 한 단지 준비해 갔는데 당시 꿀은 평소에 먹기 어려운 귀한 것이었다. 화전놀이를 할 때 귀한 꿀을 준비했다는 것은 그만큼 화전놀이가 문중 내 여성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형편이 좋지 않아 꿀을 준비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조청을 준비해 갔다.

하회마을에 시집온 부녀자들은 반가에서 자란 여성들이 많았기에 화전가를 잘 짓는 여성들이 많았다. 그래서 화전놀이를 할 때에는 반드시 화전가를 지을 종이와 붓, 먹을 준비한다. 종이의 경우 적당한 크기로 잘라 가로로 길게 말아서 준비해 가며 이 종이에 한 사람씩 돌아가며 화전가를 짓는데 글재주가 있는 여성들은 여러 편을 쓰기도 했다. 이때 종이가 워낙 길어서 한쪽에서 화전가를 지으면 종이 양 옆에서 종이를 말고 펴는 일을 반복했다. 하회마을에서 화전놀이를 할 때는 화전가를 짓는 일은 필수였기에 평소 집에서 화전가를 짓는 연습을 많이 하였다. 이날은 평소 보여주지 못했던 자신의 문장 실력을 뽐내기도 하고 서로 자신의 문장을 겨루는 부녀자들의 경쟁의 장이기도 하였다. 화전가를 다 지으면 자신이 쓴 화전가를 낭랑한 목소리로 읽으면 주위에서는 화전가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다.

보통 겸암파와 서애파의 여성들이 함께 모여 화전놀이를 하지만 서애파의 여성들만 모여 화전놀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날과 달리 과거 여성들은 엄격한 규율과 예법에 억매여 살아야 했는데 특히 하회마을과 같은 반촌의 여성들은 그 정도가 심했다. 이러한 시절에서 화전놀이는 여성들의 고된 삶 속에서 숨을 틔어주는 통풍구 역할을 하였다. 하회마을의 화전놀이는 풍산 류씨 문중의 여성들만이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타성들이 대개 경제적으로 하위층이어서 그 배우자들이 의도적으로 함께 하기를 기피했기 때문이다.

풍산 류씨 문중 여성들은 화전놀이를 가면 항상 화전가를 쓰곤 했는데 이는 영남 내방가사를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