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한국국학진흥원

하회의모든것

사회와역사

인물
전근대인물
출사
류운룡
1960년대에 찍은 겸암 류운룡 선생 묘소 전경이다.
1960년대에 찍은 겸암 류운룡 선생 묘소 전경이다.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은 본관이 풍산(豊山)으로 자는 응현(應見), 호는 겸암(謙庵)이다. 안동 풍산 하회에서 부친 류중영과 모친 안동김씨 안동김씨(安東金氏) 김광수(金光粹)의 딸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류공작(柳公綽)이다. 류성룡(柳成龍)의 형이며,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모든 경사(經史)를 통독하여 촉망을 받았다. 음보(蔭補)로 벼슬에 올라 전함사별좌(典艦司別坐), 풍저창직장(豊儲倉直長),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평시서령(平市署令),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등의 내직을 맡았고, 외직으로는 진보현감(眞寶縣監), 인동현감(仁同縣監), 풍기군수(豊基郡守)를 지냈다.

철성이씨(鐵城李氏) 이용(李容)의 따님과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류주는 평릉찰방(平陵察訪)을 지냈고, 둘째류 류기는 낭천현감(狼川縣監)을 지냈으며, 셋째 류심은 천문교수(天文敎授)를 지냈다. 장녀는 승지(承旨) 김홍미(金弘微)에게, 차녀는 홍문교리(弘文校理)인 노경임(盧景任)에게 시집갔다.

1572년(선조 2) 음사(蔭仕)를 받아 전함사별좌(典艦司別坐)가 된 뒤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여 복상(服喪)을 벗고 나서 의금부도사에 기용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두 달 만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류운룡은 사포서별제가 된 뒤 풍저창직장(豊儲倉直長) 등을 역임하면서 청렴하고 철저한 임무 수행 능력을 인정받아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로 승진하여 진보현감(眞寶縣監) 등을 지냈다. 이듬해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고향으로 내려와 있으면서 빈연서원(濱淵書院)을 지었고, 그 다음해에는 인동현감(仁同縣監)으로 추배되었다.

인동은 길재(吉再)의 고향으로 금오산에 묘소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돌보는 사람이 없어 황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에 류운룡은 무덤을 수축하여 비석을 세우고 앞 쪽에는 서원을 세워 길재 선생의 위패를 봉향하였다. 그 후 한성판관(漢城判官)을 거쳐 평시서령(平市署令)이 되었다가 사복시첨정(司僕侍僉正)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난을 피해 서쪽으로 향할 때 좌의정이었던 아우 류성룡이 선조에게 “신(臣)의 집에 노모가 있사오니 신(臣)은 마땅히 전하를 따르겠으나, 형(류운룡)의 직책을 풀어 어미를 구하게 해 주소서”라고 눈물로 호소하자, 선조가여 허락하였다.

이에 류운룡은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을 이끌고 태백산 아래 도심리(道心里:봉화군 춘양면)에 도착하여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풍기가군수(豊基假郡守)가 되었으며 이듬 해 병으로 사직했다가 가을에 다시 풍기군수로 부임하였다. 이때의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원주목사(原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노모를 위해 사퇴하고 가족들이 피난해 있는 태백산 아래 도심리(道心里)로 돌아갔다.

7년에 걸친 피난 생활을 끝내고 3년이 지난 어느 겨울 병을 얻어 눕게 되었는데, 이듬해 봄에는 증상이 날로 심해져 향년 63세로 숨을 거두었다. 사후 이조참판이 증직되었고 화천서원(花川書院)에 배향되었다.

류운룡은 어릴 때부터 총명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으며, 6세 때부터 독서를 시작하여, 15세에 이르러 소학(小學)과 사서(四書)에 통달했고,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익혔다. 16세 되던 해에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그 해 가을 도산(陶山)을 찾았다. 이 무렵 퇴계(退溪)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나 도산에서 서당을 열고 있었는데, 류운룡이 가장 먼저 퇴계를 찾아가 스스로 배움을 청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도산을 왕래하면서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류운룡의 성실함에 감탄한 퇴계는 서간을 통해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평소 류운룡은 과거 공부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독서와 사색에만 정진하였다. 나이 19세에는 하회(河回)마을 건너편 부용대(芙蓉台) 기슭의 땅을 개간하여 서재를 지었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퇴계는 ‘겸암정사(謙菴精舍)’라는 자필(自筆)의 현판을 보내주었다. 이때부터 류운룡은 서재 이름인 ‘겸암(謙菴)’을 호(號)로 삼았다.

남긴 저작으로는 문집인 『겸암집(謙菴集)』있고, 그 외 스승인 퇴계 이황과 주고받은 문답 내용을 기록해 놓은「사문문답일록(師門問答日錄)」, 1570년 12월 퇴계 이황이 병이 위독할 당시, 제자들에게 일러둔 유계(遺誡)를 기록한 글인「기사문상장시사(記師門喪葬時事)」, 1596년 윤(閏) 8월 1일에 있었던 일식(日食)의 상황을 기록해 놓은「기일식(記日食)」, 임진왜란 당시 의병진 중에서 지켜야 할 군율과 의병의 편성에 대해 써 놓은 약조인「의병소진중조약(義兵所陣中條約)」, 1557년 9월 황후징(黃候澄)과 함께 금강산을 구경하고 쓴 기행문인 「유금강산록(遊金剛山錄)」 등이 있다.

『겸암집(謙菴集)』은 8권 4책으로 이루어진 목판본으로 1743년(영조 19) 6대손 영민(永民)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광정(李光庭)·정종로(鄭宗魯)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김응조(金應祖)와 후손 원지(元之)의 발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