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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연정
1938년에 며느리들이 옥연정으로 화전놀이를 갔다. 시절이 어려운 때였지만 1년에 한번 제대로 놀 수 있는 화전놀이는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8년에 며느리들이 옥연정으로 화전놀이를 갔다. 시절이 어려운 때였지만 1년에 한번 제대로 놀 수 있는 화전놀이는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애 류성룡이 1586년(선조 19) 화천(花川) 건너 부용대(芙蓉臺) 기슭에 세운 정자로 1979년 1월 23일 중요민속자료 제88호로 지정되었다. 옥연정은 서애 류성룡이 45세 되던 해(1587년)에 건축하여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한 곳이다. 만송정에서 화천 건너 부용대 오른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 나룻배로 건너가면 곧바로 닿은 정자이다. 겸암과 서애 형제는 부용대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 각기 정자를 두고 학문에 정진했을 뿐 아니라, 부용대의 층길을 오가며 형제간의 우애를 다졌다고 전해진다. 화천이 시계 방향으로 휘감아 돌다가 방향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바뀌는 곳에 옥소(玉沼)가 있는데, 옥연정은 이 소의 남쪽에 자리 잡아 소의 맑고 푸른 물빛을 따서 옥연정이라고 이름 붙였다. 서애가 옥연정에서 읊은 칠언절구(七言絶句)를 통해서 옥연정의 정서를 공감할 만하다.



버선발로도 스스럼없는 길


강 위를 날아간 구름이 사라진 하늘은 가을


마름꽃은 뜯어도 드릴 이 없어


해거름 아득한 물길 한갓된 시름


옥연정을 짓는 데는 탄홍(誕弘)이라는 스님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서애가 공부하던 원지정사(遠志精舍)가 인가와 너무 가까운 것을 알고서 옥연정 위치에 작은 집을 짓고 거기서 남은 여생을 마치고자 할 때, 탄홍이 자청해서 그 일을 맡고서는 곡식과 포목을 시주하여 10년에 걸쳐 규모 있는 정사를 지어준 것이다. 둘레를 둥그렇게 깎아 만든 두리기둥을 스지 않고 모기둥만을 사용한 것이 독특한데, 사찰건물과 구별하려는 탄홍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승려가 나서서 정자를 지어준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당시 유림들의 사상이나 조정의 정책은 유교적 이념 아래에 있었으므로, 행세깨나 하는 지배세력들은 한결같이 척불운동과 억불정책에 적극 가담했다. 성리학과 유림의 총본산으로 알려진 안동지역도 자연히 이러한 경향을 짙게 띠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겸암과 서애는 애써 불교를 탄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암암리에 사찰측의 편의까지 도모해 주었으며, 특히 서애는 승려들에게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지내고 있었다. 이러한 태도로 인하여 서애가 의정부의 고위 관직에 있으면서 임란을 맞았을 때 승병들의 궐기와 전쟁 참여를 끌어내어 전세를 호전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승려인 탄홍이 나서서 옥연정을 지어준 것도 같은 인연이라 하겠다.

옥연정은 그 자체로 수려한 문화경관이면서, 불교와 인연이 깊은 건립배경은 당시 사회적 배경과 마을문화를 살펴보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옥연정 근처에 남아있는 능파대, 바둑터, 층길 등은 겸암과 서애 형제를 테마로 한 관광코스로 개발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