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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 풍산김씨 정려각
풍산김씨 정려각

마을로 들어가다가 큰 고개를 넘어서면 오른쪽에 풍산 김씨의 정려각이 보인다. 풍산 김씨는 세상을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며 슬퍼하다가 식음을 전폐하고 세상을 떠나고 열녀로 명해졌다.

풍산 류씨 20세인 류홍춘(柳弘春, 1753~1792년)은 살림이 넉넉지 못하였다. 그는 당시 집강(執講, 지금의 이장)으로서 마을의 세금을 거두어 관에 바치는 일을 맡았다. 어려운 살림에 세금을 조금씩 축내다보니 거둔 세금을 관에 바치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관아에서는 법에 따라 그를 데려다 곤장을 때리고 투옥했다. 그는 병이 나자 석방될 수 있었다. 석방되었지만 양반의 신분으로 당한 일이 더없이 욕된 일이었다. 류홍춘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후 부인 풍산 김씨는 남편의 빈소를 슬픔으로 지키다가, 마침내 식음을 전폐하여 3년 상도 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국왕인 정조(正祖)는 풍산 김시의 정절을 가엾게 여기고 열녀로 명했다. 문중에서는 이러한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당시 종손인 류상조(柳相祚), 류이좌(柳台佐), 류철조(柳喆祚) 등 종형제들이 주축이 되어 의장소(義庄所)를 만들었다. 의장소는 문중의 공존과 단합을 위하여 십시일반으로 모든 일가들이 재산을 모아 어려운 처지의 일가에게 식량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풍산 김씨가 열녀로 명해지게 된 까닭과 문중조직인 의장소가 생겨난 내력을 담고 있다. 류홍춘과 부인 풍산 김씨의 죽음을 계기로 생겨난 의장소는 상부상조하며 살았던 마을공동체, 특히 혈연집단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