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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신당

국신당은 화산자락 끝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을 당말개라고 부르는데 풀어서 말하면 '당이 있는 고개'라는 뜻이다. 국신당에 모시는 신격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당을 국사당(國師堂), 국시당(國侍堂)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왕신(王神)을 모신 나라당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별신굿으로 유명한 이웃 마을 수동(水洞)에도 국신당이 있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蒙塵)하는 길에 잠시 수동에서 쉬어갔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를 기념하여 국신당을 짓고 공민왕을 모셨다고 한다.

공민왕의 몽진 경로로 보아 하회의 국신당도 수동처럼 공민왕을 모셨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풍산 일대에 기반을 이루고 있던 풍산 류씨들 역시 공민왕과 일정한 연관성을 가진다. 병산서원이 있기 전에 풍악서당(豊岳書堂)이 있었는데, 서당의 토지 8백 마지기는 공민왕이 몽진할 때에 하사한 사전(賜田)이라고 전해진다.



그 당시에 하사 받은 거야. 저 상경레미콘 있는데 아마 그 쪽에 예전 풍악서당이 그쪽에 있었거든. 공민왕이 몽진하면서 이쪽으로 지나가면서 이래 보이 서당 그 안에서 학생들이 글을 읽고 있거든. 근데 공민왕이 적한테 쫓겨 가주고 오는 판에 얼마나 그렇겠어. 근데 학생들 글 읽는 소리를 들으니까 마음이 편안하고 좋았나봐. 근데 그 때 서당에 재정이 안 좋았나봐. 그래서 왕이 그걸 알고 토지를 하사했다는 거야.


[류왕근(남, 56세)]


공민왕이 풍악서당에 사전을 하사할 정도라면, 하회로 들어온 풍산 류씨들이 공민왕을 받들어 국신당에 모실만하다. 국신당을 만들고 조선조에 들어와서 점차 고려왕에 대한 추모의 정이 약해지면서 지금처럼 국신당의 이름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도 매년 정월 대보름 동제를 지낼 때 국신당에도 제를 지낸다. 국신당 형태는 서낭당과 비슷하다. 전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어른 키 높이까지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벽의 윗부분은 개방되어 있으며 지붕은 방사선형의 초가지붕이다. 당 안에 약 40cm 너비의 선반이 가로질러 있어 동제 때 제상으로 사용된다.

국신당은 하회마을의 삼당체계를 이루는 당 가운데 하나이다. 국신당의 신격은 다양하게 이야기 되고 있으나 공민왕을 모신다고 여기는 주민들이 많다. 국신당의 내력을 살펴보면 신격뿐 아니라 병산서원과 풍악서당의 내력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