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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 문소김씨 정려각
문소김씨 정려각

공인(恭人) 문소 김씨는 열녀 영양 남씨에 이어 열녀로 명해졌다. 그는 열녀 영양 남씨의 손부이자 귀촌 류경심(柳景深)의 자부이다. 문소 김씨의 남편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운구 행렬이 강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였다. 거센 돌풍이 불어 배가 뒤집히려고 하자 부인이 강에 뛰어 죽으려 했다. 남편을 잃은 것만으로도 슬픈 일인데 운구 행렬이 돌풍에 휩쓸린다면 큰 일이 아닌가! 부인은 자신의 몸을 던져 돌풍을 잠재울 수 있다면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자 신기하게도 돌풍이 잦아져 무사히 운구하니 모두가 부인의 정성 대문이라고 했다.

부인은 장례를 치른 뒤 『주자가례(朱子家例)』를 벽에다 써 붙이고 상을 난 뒤에 너무나 애통해 한 나머지 병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저는 남편을 따라가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35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광해군 2년(1610)에 정려의 명이 내려져 시조모인 열녀 영양 남씨의 정려각 안에 비를 세우게 했다. 당시에도 한 집안에 두 명의 열녀가 난 경우는 드문 일이었다. 지금까지도 두 열녀는 풍산 류씨들의 자랑으로 여겨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각은 훼손되고 도로를 확장하게 되면서 1989년 1월 20일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이 전설에서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며 자신의 몸을 불사하는 문소 김씨의 애통함이 묻어난다. 문소 김씨의 열녀비는 시조모인 열녀 영양 남씨의 열녀비와 함께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