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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각
문소김씨 정려각

 하회마을에는 두 곳에 정려각이 있다. 첫 번째 정려각은 풍산 류씨 11세인 류공권(柳公權)의 처인 영양 남씨의 정려각이다. 원래 명종 22년(1567) 5월 8일 안동시 일직면 석현(石峴)에 있었는데 1989년 1월 20일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큰 고개를 넘어서 왼편에는 정부인(貞夫人) 영양 남씨의 정려각이 있다. 이 정려각은 정부인 영양 남씨와 그의 손부(孫婦)인 문소 김씨를 기리고 있다. 풍산 류씨 11세인 이조정랑 공권(公權서 1485-1539년)은 명나라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갔다가 연경(燕京) 옥화관(玉華館)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정부인 남씨는 피눈물을 흘리며 3년 상을 났지만, 너무나도 슬퍼한 나머지 병이 들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약을 먹지도 않은 채 맏아들인 귀촌 류경심(柳景深)에게 말했다.

"오늘까지 죽지 않고 살아온 것은 너희들이 장성하기를 기다린 까닭이다." 정부인 영양 남씨는 그 날부터 음식을 끊고 세상을 떠났다. 명종 22년(1567) 5월 8일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왕명으로 정려의 명이 내려져 안동시 일직면 운산리 산3번지 국도변 돌고개에 열녀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열녀비는 도로 개설로 인하여 1989년 1월 20일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두 번째 정려각은 마을로 들어가다가 큰 고개를 넘어서 오른쪽에 있는 풍산 김씨의 정려각이다. 풍산 김씨는 세상을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며 슬퍼하다가 식음을 전폐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풍산 류씨 20세인 류홍춘(柳弘春, 1753-1792년)은 살림이 넉넉지 못하였다. 그는 당시 집강(執講, 지금의 이장)으로서 마을의 세금을 거두어 관에 바치는 일을 맡았다. 어려운 살림에 세금을 조금씩 축내다보니 거둔 세금을 관에 바치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관아에서는 법에 따라 그를 데려다 곤장을 때리고 투옥했다. 그는 병이 나자 석방될 수 있었다. 석방되어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만 양반의 신분으로 저지른 일이 더없이 욕된 일이었다. 류홍춘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후 부인 풍산 김씨는 남편의 빈소를 슬픔으로 지키다가, 마침내 식음을 전폐하여 3년 상도 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국왕인 정조(正祖)는 풍산 김시의 정절을 가엾게 여기고 열녀로 명했다. 문중에서는 이러한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류상조(柳相祚), 류이좌(柳台佐), 류철조(柳喆祚) 등의 종형제들이 주축이 되어 의장소(義庄所)를 만들었다. 의장소는 문중의 공존과 단합을 위하여 십시일반으로 모든 일가들이 재산을 모아 어려운 처지의 일가에게 식량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