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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안씨
허씨터전에 안씨문전에 류씨배판
허씨터전에 안씨문전에 류씨배판

풍산류씨 이전에 김해 허씨, 광주 안씨가 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광주 안씨들은 가장 최근까지 풍산 류씨와 공존해온 선주민이었다. 광주 안씨 20세손 안종생(安從生, 사헌부 감찰, 1400년대 생존. 사간공 安省의 四子)은 하회 또는 풍산지방에서 살던 흥해 배씨 裵素공(이조정랑, 풍산류씨 柳從惠공의 절친한 친우인 裵尙恭의 子)의 사위(女壻)이다. 그 안종생의 아들인 안팽조(安彭祖)와 그 후손은 어디인지는 모르나 하회 어디쯤에서 세거(世居)하였음이 족보기록을 통해서 확인된다. 풍산 류씨 류자온공(柳子溫)은 광주안씨 안팽명공(安彭命)에게서 수학(受學)하였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 또. 광주안씨 안희원공(安禧遠)이 1918년에 병산서원(屛山書院)의 원장(院長)으로 피임되어 일한 기록도 보인다.

안씨들이 살던 곳은 "노가리" 인근으로, 현재 상가가 있는 위치이며 선조분들의 산소는 화산에 10여기가 있으며 노가리 산에 수십기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피천석' 들판은 지금은 강물에 유실되어서 일부분만 남아있지만 하회 앞에서 부개에 이르는 300여 마지기였으며, 안씨들이 거주하던 향교골은 지금의 '연화사' 뒤편이다.

허씨들 다음에 하회마을에 광주안씨(廣주安氏) 안성이란 분이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하회에 들렀다가 너무나 마을터가 좋게 여겨져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안씨들은 허씨들이 살던 화산자락의 양지 바른 거묵실보다는 화산 서북쪽 아래쪽(향교골)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안씨들은 불교문화의 영향권에서 불교와 관련된 전설을 남겼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편리하게 어디서나 돈만 있으면 식사를 해결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지나가던 행자승이 몇 날이나 굶었든지 길에 쓰러져 거의 죽게 된 것을 집에 데려다가 음식을 먹이고 잘 간호하여 목숨을 보존하게 됨에 따라 행자승이 너무나 고마워서 "내가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것은 묘터를 잡아주는 것 뿐이라." 면서 "삼대 정승 자리가 있고, 당대 천석 자리도 있는데 한곳을 택하라."고 제의를 하였다고 한다. 이때 안씨들은 삼대 정승자리를 마다하고 당대 천석 자리를 택했다고 한다.

그 후 큰 홍수에 땅이 떠내려와서 지금의 모래벌판에 큰 들판이 생겨서 거기서 피(그 당시에는 피가 중요한 곡식 중 하나였)를 천석이나 거두었다고 한다. 그 들판이 50여년 전까지도 절반이나 남아 있어서 하회마을의 곡창이었는데 지금은 다 유실되고 그 흔적만 조금 남고, 흰 모래강변이 한없이 넓게 펼쳐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