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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놀이
삼짇날 화전놀이 모습이다.
삼짇날 화전놀이 모습이다.

화전놀이는 여성들의 놀이다. 삼월 삼짓날에 행해지는 세시풍속놀이로 알고 있지만 꼭 그날 행한 것은 아니다. 하회마을에서는 날씨가 따뜻해지고 참꽃이 필 무렵이면 딸네들의 주도하에 가까운 곳에 단체로 여행을 갔다. 화전놀이는 일년에 단 한차례만 가기 때문에 풍산 류씨 문중의 거의 모든 여성들이 이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문중의 여성들 사이에서 화전놀이를 가기로 한 날이 결정되면 딸네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며느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문중에서는 이날 하루만큼은 며느리들의 외출을 허락하였다. 화전놀이는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한 번에 40-50여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했으며 주로 딸네들과 며느리들이었다. 간혹 짐을 옮겨주는 남자가 동행하기도 하지만 그 이는 놀이판에 참여할 수 없었다. 보통 화전놀이를 가는 곳은 병산서원이나 옥연정사처럼 풍경이 좋은 곳이었다. 옥연정사로 화전을 갈 때는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화천)을 건너가야 했는데 그곳에 있는 큰 배를 이용했다. 배는 한번에 60여명이 넘는 사람을 옮길 수 있을 만큼 컸으며 두 명의 사공이 노를 저었다. 배 위에서는 화전을 가는 이들의 선유를 벌어지기도 하였다.

화전놀이를 가서는 다양한 놀이를 즐겼다. 딸네들과 며느리들 사이에서 윷놀이가 벌어지기도 하였으며 가사를 지어 뽐내기도 하였다. 윷놀이에 이긴 편은 덩실덩실 춤을 추고 노래하였으며 진편은 그 애석함을 토로하였다. 보통 딸네들이 많이 이겼으며 이는 딸네들의 발언권이 그만큼 크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하회의 윷은 건궁윷말을 쓰기 때문에 발언권이 큰 편이 좀 더 유리했고 보통 딸네들의 발언권이 더 셌다. 윷놀이 뿐만 아니라 가사를 짓는 이들은 평소 갈고닦은 문장솜씨를 뽐내며 화전가를 지었다.

병산서원이나 옥연정사에 도착하면 먼저 점심을 지어 먹었다. 보통 점심으로는 비빔밥을 즐겨 먹었다고 하며 점심 후에는 참꽃을 꺾어 화전을 만들어 먹었다. 화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집집마다 쌀을 조금씩 거둬왔다.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좀 더 많은 쌀을 내놓았으며 화전을 구울 때 필요한 기름으로 대신하는 이들도 있었다.

화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찹쌀가루와 ‘덴뿌라 기름’이 필요했다. 찹쌀은 화전을 오기전에 미리 거둬서 빻아두었으며 이를 반죽하여 참꽃을 수놓아 구웠다. 50명 이상의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을만큼 많이 구웠으며 만들어진 화전은 꿀에 찍어먹었다. 만약에 꿀이 없으면 조청에 찍어먹기도 하였다. 화전에 가서 먹은 음식은 화전만이 아니었다.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화유가를 보면 쑥을 뜯어 갱탕을 만들어 먹고 송어회를 먹기도 하였다. 이에 술을 곁들어 먹기도 하는 등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그만큼 화전은 여성들에 있어 최고의 축제이며 놀이었다.

서산에 걸린 해가 뉘엇뉘엇 해지면 화전은 끝이 났다. 며느리들은 일장춘몽처럼 빨리 지나간 화전놀이를 마무리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간 며느리들은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야 했으며 이는 고달픈 시집살이가 다시금 시작됨을 알리는 일이었다. 며느리들은 앞으로 일 년 간 화전놀이를 손꼽아 기다려야 했으며 혼기가 다 된 딸네들은 앞으로의 시집살이를 걱정해야 했다.

하회의 화전은 규모가 매우 컸다. 보통 40여명 이상의 며느리와 딸네들이 같이 화전을 갔으며 이 날 하루만큼은 시집살이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화전놀이는 고단한 시집살이에서 해방된 며느리들이 그 동안 쌓인 애환을 풀어내는 통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