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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댁
북촌댁

북촌댁은 솟을대문을 세우고 마을 북쪽을 대표하는 고가로서, 류사춘이 1797년 건물을 짓기 시작해서 석호 류도성이 1862년 완성했다. 예부터 북촌댁은 인심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지금까지도 마을에서는 석호 류도성의 인심과 선행이 귀감이 되고 있다.

동쪽으로 나있는 북촌댁 솟을대문은 하회에서 가장 우뚝하다고 할 정도로 크기가 웅장하다. 북촌댁은 솟을대문 양옆으로 이어진 문간채와 사랑채, 안채로 이루어진 본채 그리고 별당채와 사당이 따로 있다. 문간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광을 두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중간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인 화경당(和敬堂)과 수신와(須愼窩)를 만날 수 있다. 이 사랑채의 뒤편으로 북촌댁의 안채가 ㅁ자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북촌댁의 큰 사랑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북촌댁의 큰 사랑채는 ㅁ자를 이루는 본채를 마주보고 오른편에 외따로 지어졌다. 북촌유거(北村幽居)라는 현판을 달고 본채와 떨어져 있는 큰 사랑채는 집안에서 가장 큰 어른이 머물렀던 곳이다.

북촌의 인심과 선행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귀감으로 여겨진다. 처음 북촌댁은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다. 학서 류이좌(鶴棲 柳台佐)의 아버지 류사춘(柳師春)이 정조 21년(1797)에 작은 사랑채와 문간채를 처음 지었고, 그 뒤를 이어 석호 류도성(柳道性, 1823-1906)이 지금의 북촌댁을 이루었다.

북촌댁이 사람들에게 귀감으로 여겨지고 있는 이유는 석호 류도성이 건물을 증축하면서 일어난 사건에서 시작된다. 하회에는 큰 수변이 난 일이 있었다. 당시에는 다른 곳에 있던 조상의 묘소를 강 건너 마을인 광덕에 이장을 했다고 한다. 이장을 마친 사람들이 마을로 돌아오려면 배를 타는 방법뿐이었다. 사람들은 무리하게 배에 올라탔고, 그것이 화근이 되어 배가 전복되었다. 해질 무렵 갑자기 일어난 수변이었고 변변한 구조 장비도 있을리 없었다. 이 때 북촌에서는 집을 증축하기 위하여 좋은 재목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 북촌 주인이었던 석호 류도성은 장만해 두었던 재목을 강가에 옮겨 태워서 대낮같이 하여 물에 빠진 사람들을 찾는 것을 도왔다.

애써 구한 재목들은 태워버렸지만 사심을 버리고 사람들을 구한 석호 류도성의 음덕은 본받아야할 것이다. 만약 당시에 수변이 나지 않았더라면 북촌댁의 건립연도는 좀 더 당겨지지 않았을까. 인심이 좋은 집에는 대추가 많이 열린다고 전해진다. 그게 사실이었는지 옛날 북촌댁에는 대추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북촌댁에서는 대추가 주렁주렁 열리면 마을사람들 누구나 대추를 양껏 따갈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양진당, 충효당과 함께 북촌댁은 하회를 대표하는 고가로 손꼽힌다. 북촌댁은 영남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을 갖추었으며 웅장한 규모 또한 대단한 볼거리이다. 하지만 북촌댁이 주목받는 진정한 이유는 석호 류도성의 보이지 않은 선행과 인심이 주민들의 마음에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은 아닐까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