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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
영모각을 개관하고 찍은 기념사진이다.
영모각을 개관하고 찍은 기념사진이다.

보물 제41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풍산 류씨 서애파의 종택이다. 서애 선생이 농환재(풍산읍 서미리)에서 별세한 뒤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장손인 졸재 류원지 공이 유림들의 도움을 받아 창건하였다 한다. 현판은 우의정을 지낸 미수 허목의 친필이다. 충효당은 화천과 원지산의 경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서쪽을 향하고 있다. 소백산맥의 줄기인 화산의 지맥(地脈)을 따라 서향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평소 생활이 검소하기로 유명하고 재상의 자리에 오르고도 청백리로 알려진 서애는 지금의 충효당을 지을 만큼 살림이 넉넉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충효당은 원래 단촐하였는데, 서애의 문하생들과 후손들이 그의 유덕을 기리는 뜻에서 증축하여 지은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서애의 증손인 류의하(柳宜河)가 확장·증수하였다고 한다.

가옥의 형태는 양진당과 마찬가지로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행랑채가 전면에 독립되어 있고 사랑채가 안채의 앞쪽으로 연결되어 있어 독특하다. 그런 까닭에 대문채와 사랑채 사이의 거리마당이 넓지 않다. 대신에 대문채 바깥에 작은 광장이라고 해도 좋을 바깥마당이 넓게 자리 잡고 있다. 이 바깥마당은 대부분 잔디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석탑과 같은 불교문화 유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근처에 절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채 주변의 거리마당은 물론 대문채 밖의 마당까지도 여러 가지 나무들이 자라고 꽃밭에는 가지각색의 꽃이 잘 가꾸어져 있어 경관이 무척 아름답다. 옛날과 다르게 부리는 사람도 없고 식구들도 줄어들어 넓은 종가의 뜰을 온전하게 가꾸기는커녕 청소조차 제대로 하기 어려운 것이 요즘 종가들이다. 하지만 충효당은 예외이다. 마치 정원사가 있어서 늘 손질을 해주고 있는 듯하다. 충효당에는 종손 내외가 거주하고 있어, 따뜻한 햇살이 내리쬘 때면 종부가 정원을 손질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솟을대문과 함께 一자 모양의 긴 행랑채에는 대문칸을 포함하여 12칸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대문칸 오른쪽에는 대문 출입을 지키는 위병실과 광, 헛간이 차례로 한 칸씩 있고 외쪽으로는 마구간 1칸, 광 2칸, 다시 마굿간 1칸, 부엌 1칸, 방 2칸, 헛간 1칸 등의 배치되어 있다. 행랑채가 독립 건물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종가의 위세를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본채와 다르게 약간 허술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서애의 8대손인 류상조(柳相祚)가 병조판서를 제수받고 며칠 안에 들이닥칠 군사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서둘러 지은 탓이라고 한다. 행랑채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채의 대청을 마주하게 된다. 대청 가운데 걸려 있는 충효당이라고 쓰인 현판은 미수 허목(許穆)이 쓴 것이다. 서애야말로 충효를 겸비한 인물이라는 뜻에서 미수가 이 당호를 직접 써준 것이다.

사당은 서향인 본채와 달리 남향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면에 중문(中門)과 동협문(東夾門), 서협문(西夾門)의 삼문(三門)이 세워져 있다. 일반적으노 삼문은 삼정승 육판서와 같은 인물을 모신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집이 아니면 세우지 못한다. 충효당의 사당에 삼문을 낸 까닭은 이 사당에 봉안한 신위 가운데 한 분이 의정부의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