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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골(활인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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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씨가 터를 잡고, 안씨가 문중을 이루고, 류씨가 잔치를 벌이다

하회마을에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杯盤)에’라는 말이 전한다. 김해 허씨가 터를 닦아놓으니 그 위에 광주 안씨가 집을 지었으며 풍산류씨는 안씨 집 앞에서 잔치를 벌였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는 허씨가 최초로 하회마을의 터를 개척했고, 뒤를 이어 안씨들이 들어와서 문중을 이루면서 세(勢)를 확장했으며, 마지막으로 정착한 류씨가 잔치판을 벌일 정도로 가문이 번성했다는 말이다.

김해 허씨가 하회마을에 터를 잡고 개척했다는 이야기는 하회탈을 만든 허도령 전설에서도 뒷받침된다. 즉, 허도령이 꿈에 서낭신의 계시를 받고 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작업광경을 다른 사람이 들여다보면 안된다는 금기를 어기고 그를 사모하던 김씨 처녀가 몰래 엿보다가 허도령이 피를 토하면서 숨을 거두었다는 전설이다. 이런 이유로 당시 허도령이 만들고 있던 이매탈은 마무리를 하지 못하여 턱이 없는 탈이 되었다. 또한 김씨 처녀는 자신으로 인해 허도령이 죽자 시름에 겨워 죽어버렸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김씨 처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화산의 상당에 서낭신으로 모시고, 허도령의 영혼은 큰고개 성황당에 모셨다. 김해 허씨들이 하회마을에 정착했던 것은 고려 중기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아쉽게도 이에 대한 명확한 증거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다만 광덕동 건짓골에 허정승 묘가 전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또 화산 기슭의 허씨 종택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서 기와장과 대형 주춧돌이 24개나 발견되었다고도 한다.

김해 허씨의 뒤를 이어 하회마을에 들어와서 문중을 이룰 정도로 경제적 기반을 다졌던 광주 안씨와 관련된 증거자료 역시 뚜렷이 전하는 것은 없고, 다만 마을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피 천석 묘’라는 전설을 통해 확인된다.

고려시대 가난한 안씨 부부가 들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쓰러져 있는 행각승을 만났다. 안씨 부부는 이를 가엾게 여기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살림살이가 빈곤함에도 불구하고 정성껏 보살펴 주었더니, 건강을 회복한 스님이 고마움의 보답으로 명당을 잡아 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후손 중에 삼정승이 나는 명당과 당년에 천 석을 거두는 명당 가운데 고르라”고 했다. 이들 부부는 살림이 워낙 궁색했던지라 천석을 거두게 되는 명당을 원했더니, 묘터를 잡아주었다. 이에 안씨 부부는 스님이 정해준 자리에 부모님의 묘를 옮겼는데, 그 해 여름 장마가 들고 물길이 바뀌더니 묘 아래쪽 지금의 섬들 주변에 드넓은 갯벌이 생겨나면서 들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안씨 내외가 그 들에 피를 뿌렸더니 그 해에 천석을 수확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마을사람들은 안씨 묘를 일컬어 ‘피 천 석 묘’라고 불러왔다.

내용에 등장하는 섬들이란 하회마을의 북서쪽 기슭에 자리한 장소이다. 그런데 하회마을에서는 화산자락의 양지바른 논과 들을 명당으로 여기고 있는데, 당시 안씨들이 섬들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화산자락 주위에는 이미 허씨들이 터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뒤늦게 들어온 안씨들은 허씨들의 터전을 피해 섬들에 정착했던 것이다. 아울러 광주 안씨들이 하회마을에 거주했다는 사실은 동원록(洞員錄)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838년에 작성된 동원록에는 총 93명의 동원 명단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안씨 성을 가진 이는 3명이다.

3년 동안 적선을 베풀고 비로소 정착하다

풍산 류씨를 ‘하회 류씨’라고 일컬을 정도로 하회마을은 ‘류씨들 마을’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 이유는 비록 김해 허씨가 마을 터를 닦고, 뒤이어 광주 안씨가 들어와서 문중을 이룰 만큼 경제적 기반을 구축했지만, 가장 마지막으로 정착한 풍산 류씨들이 잔치를 벌일 정도로 가문을 번성시켰기 때문이다.

풍산류씨 하회마을 입향조는 시조 류절(柳節)의 6세손인 전서공(典書公) 류종혜(柳從惠)이다. 원래 그는 풍산읍 상리에 거주하다가 하회로 옮겨 살았는데, 당초에는 큰고개[大峴]라는 곳에 집을 지은 것으로 전한다. 그런데 이미 김해 허씨와 광주 안씨가 터를 잡아 살고 있는 마을에 혼인이나 여타 인연 등이 없는 상태에서 정착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류종혜 역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하회마을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에 대해 마을에는 다음의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전서공이 3년 동안 화산을 오르내리면서 연화부수형의 명당임을 알고 하회에 터를 잡고자 지금의 양진당 자리에 집을 지었다. 그런데 집을 지어놓으면 밤사이에 무너지곤 하기를 수차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도사가 현몽하여 이르기를 이 터에다가 집을 지으려면 마을로 들어오는 고갯길에서 3년 동안 만인(萬人)에게 적선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고개에다가 원두막을 짓고 길 가는 사람들에게 밥도 주고 신발도 주고 잠도 재워주며 3년 동안 적선을 하였다. 그런 다음 집을 지어서 터를 잡았다.

당시 풍산 읍내에 살고 있던 류종혜는 하회마을의 경관이 수려하다는 소문을 듣고 터전을 옮길 결심을 하고 화산 정상에 올라 이곳저곳을 바라본 끝에 지금의 양진당 터에 집을 세우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둥을 세우면 넘어지곤 하기를 수차례 반복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산신령이 꿈에 나타나 “그곳은 네 터가 아니다. 굳이 네 터를 만들려면 3년 동안 활만인(活萬人)을 하여라”는 계시를 내린다. ‘활만인’이란 만 명의 사람을 구원하라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이는 불가능한 일에 가까운 요구였다. 그러나 류종혜는 포기하지 않고 지금의 큰고개 밖에 작은 집을 마련하여 길손들에게 밥을 주는가 하면 짚신을 건네주는 등 3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만여 명에게 공덕을 베푼 뒤 기둥을 다시 세우니 그제야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풍산류씨 가문에서는 류경심(柳景深, 호는 龜村), 류중영(호는 立巖), 류중엄(柳仲淹, 호는 巴山)을 비롯하여 류운룡과 류성룡 등의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되어 지금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