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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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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사
류경심

류종혜 현손, 대사헌

류경심(柳景深; 1516~1571)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이 풍산(豊山)이고 자가 태호(太浩). 호는 귀촌(龜村)이며 지평(持平)을 지낸 류공권(柳公權)의 아들이다. 외향인 일직(一直) 귀미(龜尾)에 살았다.

중종34년(1539) 부친인 정랑공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인 남씨부인은 애도 비통하며 삼년상을 나고도 탈상을 하지 않고 여러 자녀들의 양육을 아들인 귀촌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오늘까지 죽지 못한 것은 너희들의 성장을 기다렸기 때문이다”하고는 식음을 전폐하여 세상을 떠났다(1542년, 중종37).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의 명이 내렸다. 현재 하회마을로 들어서는 고개목에 열녀비와 비각이 이건되어 있다.

여러 남매의 맏이로서 어린 동생들을 잘 보살피는 등 우애도 독실했다. 묘소는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능동(陵洞)에 있다. 공은 9녀를 낳은 뒤 1남을 두었으나 21세에 세상을 떠났고, 손자도 35세에 사망하여 대가 끊기자 겸암의 후예로 후사를 이어 제사를 받들고 있다. 종질(從侄)인 서애가 지은 비문을 써서 1985년에 세운 묘비가 묘소 앞에 서 있다.

1544년(중종 39년)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ㆍ정자(正字)를 지내고, 1546년(명종 1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서 문과중시에 장원하고, 이듬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551년 재기용되어 회인현감, 정주목사, 나주목사, 회령부사, 호조참판, 대사헌, 병조참판 등 직을 지내고 평안감사의 명을 받았다. 공은 폐병으로 병세가 위중하였으나 왕명을 어길 수 없어 억지로 부임길에 오른뒤 5월에 병세가 극심하여 체임을 상소하고 다시 지충주부사가 되어 돌아오던 도중 장단(長湍) 초현리(招賢里) 민가에서 세상을 떠났다. 국왕은 관곽을 하사하고 귀장(歸葬)케 했다. 향년 56세.

관리로서 매사를 물 흐르듯 처리했고 수령들의 횡포를 적발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휼해 가는곳 마다 칭송을 받았다. 미암(眉巖) 류희춘(柳希春)은 그의 『일기(日記)』에서 “이사람은 지향하는 바가 정당하고 재기가 빼어났으며, 항상 백성들을 아끼고 구제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했다. 문장이 뛰어나 변영청(邊永淸) 장문보(張文輔) 등과 함께 ‘영가삼걸(永嘉三傑)’이란 칭이 있었다. 외향인 일직(一直) 귀미(龜尾)에 살았다. 풍천(豊川) 낙고사(洛皐祠)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 『귀촌집(龜村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