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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중엄
타양서원
타양서원

류중엄(柳仲淹;1538-1571)은 본관이 풍산(豊山)으로 자는 경문(景文) 또는 희범(希范)이며, 호는 파산(巴山)이다. 안동 하회에서 생부 류공석(柳公奭)과 어머니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응삼(權應參)의 따님과의 사이에서 태어나 막내 숙부인 류공계(柳公季)에게 입후되었으며 조부는 류자온(柳子溫)이다.

류중엄은 사촌형인 입암(立巖) 류중영의 두 아들 겸암(謙菴) 류운룡, 서애(西厓) 류성룡과 함께 공부를 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모두 함께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배웠다. 1570년(선조 3년) 겨울에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나고 그 이듬해 12월 25일에 류중엄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34세였다. 사후 타양서원(陀陽書院)과 분강서원(汾江書院)에 배향되었다.

류중엄의 부인은 영천이씨(永川李氏)로 효절공(孝節公)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증손이고 이문량(李文樑)의 손녀이며, 진사 이학수(李鶴壽)의 딸이다. 류중엄은 류학룡(柳學龍)·류경룡(柳慶龍)·류종룡(柳從龍) 등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 류학룡에게 아들이 없어 둘째인 류경룡의 아들 류담이 그 대를 이었다.

1564년(명종 19) 종형(從兄) 입암공(立巖公)이 황해도 감사(監事)가 된 그해 겨울에 겸암, 서애 두 사람과 함께 해주(海州)의 신광사(神光寺)에 머무르면서 몇 달 동안 공부를 하였다. 그 해 청량산(淸凉山) 보현암(普賢庵)에 있을 때 퇴계 이황이 여러 제자들과 같이 산에 들어와서 유람할 때 맞아 모시고 곳에 따라 시(詩)를 주고받았는데, 퇴계는 류중엄의 시에 차운해 “아름답다! 그대의 침착한 성질과 사치를 멀리함이여. 나의 배움은 흡사 뱀의 말을 붙임이나 다름없구나. 절 방을 찾아와서 저녁별이 빛나도록 대화하게 되니, 창 밖에 꽃 없음을 혐의(嫌疑) 적게 여기지 않노라"라고 했다. 이를 통해 그에 대한 퇴계 이황의 기대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류중엄은 한강(寒岡) 정구와 교유했는데, 그가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왔을 때 올린 제문에서 “공의 깨끗한 품행과 침착한 자질은 친구들 중에서 가장 보기 드물었다”고 하였고, “상종(相從)하여 갈고 닦는 공부에 참으로 존경하는 친구로 대하였고, 평생에 기대함이 보통이 아니었으며 훗날에 원대한 뜻을 가짐은 본래 하류 친구는 알 수 없는 바였다”고 했다.

류중엄이 세상을 떠나자 겸암(謙菴) 류운룡은 송암(松巖) 권호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르길 “희범 숙(叔)이 전월 25일에 돌아가셨으니, 우리 집 가화의 참혹함을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재주를 품고 기구한 운명에 부딪쳤으며 명이 또 길지 못하니 원통하기 그지없습니다"고 하면서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요절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류중엄은 타고난 성품이 아름답고 실천의 학문에 전심(專心)하였으며,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업을 하는 데 뜻이 독실하고 배움에 열심이어서 퇴계의 기대가 컸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약관에 생가의 모친상을 당하여 일 년 복을 마친 뒤에도 상복을 벗지 않으려고 하자 스승인 퇴계가 “선왕이 제정한 예를 어길 수 없다”하자 드디어 상복을 벗었다.

또한 퇴계학파의 선배들은 그를 두고 남치리(南致利)와 더불어 천품이 순진하며 학문을 물음에 간절하고 독실하므로 공자 문하의 안자라 일컬었다. 남긴 저작으로는 그의 글을 모은 『파산일고(巴山逸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