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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후장
주일재
주일재

류후장(柳後章; 1650-1700)의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자는 군회(君晦)이고 호는 주일재(主一齋)이다. 아버지 류만하(柳萬河)와 어머니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집(朴緝)의 따님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류원지(柳元之)이고 증조부는 류여이며, 고조부는 서애 류성룡이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를 지냈다.

1706년(숙종 32) 2월 숙부인의 초상에 몸을 상한 것이 병이 되어 3월 초하루에 세상을 뜨니 향년 57세였다. 원근의 사림들이 다 탄식하고 애통해 하면서 “이 사람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들은 장차 어디에 의지할까.”하였다. 돌아가신 부친의 묘 계단 아래 오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안동권씨로 승지인데 추증된 권윤의 딸로 훌륭한 덕을 갖추었다.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없어 조카 류성사(柳聖師)를 후사로 삼았다.

나이 겨우 30세에 이미 천거의 명단에 올랐고 40세에 건원릉참봉에 제수되어 직책을 맡았지만, 얼마 후 어버이의 연로함으로 인하여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이에 서울의 많은 선비들이 찬탄하며 칭송하기를 “영남에서 진정한 유자가 다시 나왔다”고 하였다. 1691년(숙종 17)에 다시 계방부솔(桂坊副率)가 제수되었다. 1693년(숙종 19)에 또 자의(諮議)가 제수되자 글을 올려 극력 사양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자 3번이나 상소를 올려 윤허를 얻었다.

류후장은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총명하여 또래에서 특히 빼어났다. 9살에 『소학』을 배웠는데 대의에 통달하여 일상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를 마치 노숙한 어른 같았다고 한다. 조부인 졸재 류원지를 이를 보고 “이 아이는 필시 우리 가문을 크게 번성 시킬 것이다”라고 했다. 18세에 목재 홍여하에게서 『주역』을 배웠는데, 목재 홍여하가 말하기를 “류후장은 『주역』을 배워 이미 거의 통달하였으니 내 감히 스승이 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

평소에 거처할 때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상수의 미묘함과 예설의 번다함에까지도 정밀하게 연구하고 밝게 통달해야만 그만두었다. 항상 서안에 『심경』,『근사록』,『주자서(朱子書)』를 놓아두고 읽었다. 예설에 있어서는 공부가 매우 깊고 넓어 정성들여 생각하여 고구(考究)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종가의 서객이 다섯 수레나 되지만 대부분 외었으며, 다른 책에서 문장의 뜻이 서로 통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책 윗부분에 적어 두어 서가에 있는 책들에 대부분 수적(手蹟)이 있었다. 남긴 저작으로는 그의 글을 모은 『주일재집(主日齋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