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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류전서공 묘소
류전서공 묘소

풍산류씨는 도시조 류차달의 14세손 류절을 1세조로 하여 계보를 잇고 있다. 『풍산류씨세보』와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그는 본래 수주(예천의 옛 지명) 출신으로 고려조에서 호장을 역임했으며, 그의 증손 백伯이 충숙왕 때 은사급제를 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한편 조목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종개는 백의 9세손으로 예조참의에 추증되고 봉화의 문계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시조 절의 12세손 중영은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로 황해도 관찰사와 병마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전서공의 할아버지이자 고려의 도염서령(都染署令)의 벼슬에 있던 류난옥(柳蘭玉)은 풍수가를 찾아가서 집을 지을 새로운 터를 물었다. 풍수가는 그에게 3대 동안 적선을 한 뒤에 훌륭한 길지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류난옥은 하회마을 동구 밖에 관가정(觀稼亭)이라는 집을 짓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적선을 베풀었다. 이 공덕은 아들과 손자 대까지 이어졌다.

전서공 또한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 적선의 공덕을 쌓아 하회마을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풍산 류씨가 하회에 터를 잡게 된 내력은 마을 입구에 있는 전서공 류종혜의 기적비(紀蹟碑)에 자세히 새겨져 있다. 전서공이 화천(化川)가에 터를 잡을 당시에는 그 일대가 울창한 숲과 늪으로 밀림을 이루었다고 한다. 지금의 삼신당 곁에 절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서 중들이 견디지 못하고 떠나 버려서 절이 사라졌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 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탑신(塔身)들이 삼신당 주변에 한둘 흩어져 있는데, 지금도 그 탑신 가운데 하나가 삼신당의 제단(祭壇)으로 이용된다.

기록에 의하면 전서공은 화산 주변의 허씨와 안씨의 묘지를 피하여 울창한 숲을 헤치고 절 근처에 집을 지으려고 했다. 몇 번씩 집짓기를 시도했지만 집은 완성이 채 되기도 전에 무너졌다. 근처를 지나가던 도사는 전서공에게 "아직 이 땅을 가질 운세가 아니니, 꼭 이 땅을 가지고 싶다면 앞으로 3년간 덕을 쌓고 적선을 해야 할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이에 큰고개 밖에 정자를 지어 놓고 식량과 옷가지, 짚신 등을 마련하여 3년 동안 인근 주민과 나그네들을 먹이고 입히며 적선했다. 그런 뒤에 집을 짓자 더 이상 무너지지 않았다. 그 때 집을 이룬 것이 지금 양진당의 사랑채 일부라고 한다.

주민들의 이야기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전서공이 하회에 터를 잡고자 양진당 자리에 집을 지었다. 그런데 집을 지어놓으면 밤새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어느 날 전서공의 꿈에 도사가 나타나 말하기를 "이 터에 집을 지으려면 마을로 들어오는 고갯길에서 3년 동안 만인(萬人)에게 적선을 하라."고 했다. 전서공은 큰 고개에다 원두막을 짓고 길 가는 사람들에게 적선하고 집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전서공이 많은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길지에 마을을 이루어 발복(發福)한 것인지 하회에 터 잡은 풍산 류씨는 점차 번성했다. 반면에 화산 기슭에 터를 이루었던 허씨와 안씨는 상대적으로 문중이 위축되어 하회를 떠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다. 결국 하회마을은 허씨와 안씨의 터전이었던 화산 기슭에서 화천가에 자리 잡은 류씨들의 터전으로 중심을 이동하게 되었다.

조선조에서 세도가문으로 명성을 떨친 풍산류씨는 특히 ‘중흥의 명상’으로 일컬어진 서애 류성룡을 배출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서기 1542년(중종 37) 10월 1일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에서 관찰사 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성룡은 안동도산에서 당대의 석학 퇴계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근사록』을 전수받았다. 일찍이 이황은 "이 젊은이는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라며 그의 재능을 극찬하면서 장차 대성할 인물임을 예언했으며, 그는 나이 25세 때인 1566년(명종 21)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권지부정자로 벼슬길에 오르기 시작, 임진왜란 때는 사도도체찰사와 영의정으로서 전쟁을 주도했다. 특히 그는 학문, 문장, 글씨 등에 뛰어났으며, 덕행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그외 많은 글과 저서를 남겼으며, 그중 『장비록』과 『신경록』, 『영모록』 등이 유명하다.

한편 그의 형 운룡도 퇴계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사복시첨정을 거쳐 풍기군수로 토적을 소탕하였으며, 원주목사를 역임하여 이름을 날렸다. 그밖에 인물로는 성룡의 여섯 아들 중 넷째 진이 유일로 지평을 지냈으며, 8세손 심춘은 도정을 역임, 후조는 고종 때 공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올라 봉조하가 되어 명문 풍산류씨를 더욱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