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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낭당, 국신당
중당(국신당)의 옛모습이다. 고깔을 쓴 무당이 함께 있어 별신굿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중당(국신당)의 옛모습이다. 고깔을 쓴 무당이 함께 있어 별신굿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하회마을에는 동신을 모시는 당(堂)이 다섯 곳이나 되었다. 서낭당과 국신당, 삼신당이 삼당을 이루면서 섬겨졌고, 각각 상당(上堂), 중당(中堂), 하당(下堂)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세 개의 당 외에 마을 입구 쪽에 두 개의 당이 더 있다. 마을 입구 큰 고개, 즉 탕건바위가 있는 곳과 주로 상민들이나 일꾼들이 이용한 작은 고개에 돌을 높이 쌓아둔 곳에 제각기 성황당(城隍堂)이 있다. 이것은 서낭당이나 국신당과는 달리 화산의 지맥을 따라 형성된 것이 아니라,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인 동구 밖의 두 고개에서 마을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두 개의 당은 도로를 확장하면서 모셔지지 않게 되었고 현재는 서낭당, 국사당, 삼신당만을 모시고 있다.

서낭당은 화산(꽃뫼) 중턱에 자리 잡고 있으며 무진생(戊辰生) 의성김씨 여서낭을 모시고 있다. 국신당은 화산 자락의 묘지와 논 사이 숲속에 외따로 자리 잡고 있으며, 삼신당은 마을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주민들은 세 당 가운데 서낭당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서낭당에는 허도령을 사모하여 탈막을 엿보다가 살을 맞아 죽은 처녀를 신으로 모셨다고 한다. 흔히들 서낭신을 '김씨 할매' 또는 '무진생 서낭님'이라고 부른다. 예나 지금이나 서낭님은 꽃뫼 능선 그 자리에서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주민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날 꽃뫼 능선에 자리 잡은 서낭당에서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건강을 위해 제사를 지낸다.

당제를 지내는 것만 보더라도 하회마을에서는 서낭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개의 당 가운데 서낭당에 가장 먼저 제를 올리고 국신당, 삼신당의 순서로 제를 올린다. 또 서낭당제에서는 포와 술, 떡, 과일, 문어 등의 여러 가지 제물을 올리고 산주를 비롯하여 10명 내외의 주민들이 제관으로 참여한다. 하지만 국신당과 삼신당의 제의에서는 포와 술만을 제물로 올리고 산주와 주민 한 두 명만 따라가 제를 올린다. 서낭당의 제의를 다른 당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이다.

하회마을에는 지금까지도 서낭신과 관련된 전설과 신앙이 풍부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셈이다. 이렇게 서낭신과 관련하여 형성된 문화가 두드러지기 때문에 서낭신만을 모시고 있다고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하회마을사람들은 서낭당과 함께 국신당(국사당, 국시당)과 삼신당을 모시고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 상설공연장 뒤편 화산 중턱에 무진생 김씨를 모신 서낭당이 있으며, 상설공연장에서 주차장을 거쳐 이어지는 농로를 따라 가면 묘지와 논 사이에 자리 잡은 국사당(국신당, 도령당)이 있다. 삼신당은 서낭당, 국신당과 달리 사람이 사는 마을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데 특별한 집의 형태를 띠지 않고 600년 수령의 노거수가 자리 잡고 있다.

국신당에 모셔진 신격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더러 국사당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왕을 신격으로 모신 '나라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을 병산서원의 유래를 통해 생각해볼 수 있다. 서애 류성룡을 배향하고 후학을 기르기 위해 세워진 병산서원은 초기에 풍악서당이라는 이름의 작은 서당이었다. 고려 후기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하면서 병산서원의 전신인 풍악서당에 토지 800마지기를 하사했다. 이 사실을 고려한다면 공민왕을 국신당에 모실 법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