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한국국학진흥원

하회의모든것

사회와역사

인물
전근대인물
충효
류도성

류도성(柳道性; 1823-1906)의 호는 석호(石湖), 자는 선여(善汝)인데 참판 류이좌(柳台佐)의 손자이며 예안 현감을 지낸 류기목(柳祈睦)의 아들이다.

1823년(순조 23년) 12월 28일에 태어나 일찍부터 호학호문하였으나 관직에는 뜻이 없어 향촌에서 후학을 육성하며 영남일대 유림 사회의 영수급으로 지내다가 1882년(임오년) 당시 영의정 홍순목의 추천에 의해 경상도사를 역임하였다.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지냈다.

류도성의 부친은 벼슬살이로 서울에 있을 때 연줄을 타서 그를 벼슬길에 나아가게 하기 위해 어느 세도가에게 명함(名啣)을 바치도록 시켰다. 류도성은 부친의 명을 어길 수가 없어 나귀를 타고 그 집 문 앞까지 갔었지만, 높은 벼슬아치들이 타는 가마와 수레가 그 뜰 앞에 가득하고 많은 선비들과 벼슬아치들이 모여 분잡하기 이를 때 없는 것을 보고 수치스럽고 기개를 굽히고 싶지 않았다. 세 번씩이나 갔다가 세 번 다 만나지 않고 그대로 돌아왔다.

이에 대해 부친도 아첨해서까지 벼슬자리에 나아갈 뜻이 없다는 의지를 이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 뜻한 바를 이루도록 명하였다. 그 명에 따라 임천으로 돌아와 소요하며 그가 좋아하는 자연과 더불어 앞날의 꿈을 키우며 지냈다.

을해년에 류도성은 집을 짓기 위해 양질의 춘양목을 강변에 적재 건조 중에 있던 중, 마을 강 건너 부용대 쪽에서 상갓집에 조문 갔다 오던 일가 수십 명이 탄 배가 홍수로 전복되는 사고를 만난다.

당시 인근 동네에서 떠내려 오던 목숨이 경각에 이른 많은 수재민을 구하기 위해 재목 일부는 강물에 뗏목으로 밀어 넣어 붙잡아 살게 하고 나머지는 불을 질러 어둠을 밝혀 수많은 목숨을 구하였다.

이후 어렵게 재목을 다시 구해 현재의 집을 지을 수 있었는데, 당초의 재목으로 건축하였더라면 건축연도가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다.

1895년(을미년)에 단발령이 공포되어 그 소식에 안동 전해지자, “삭발은 임금의 참 뜻이 아니리니, 머리를 바칠지언정 단발은 할 수 없노라”며 항변했다고 한다. 이에 김흥락(金興洛)·류지호(柳止鎬)·김도화(金道和)·류지영(柳芝榮) 등 유림 대표들과 함께 봉화 닭실[酉谷] 출신의 참봉 권세연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1차 안동의진에서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맡았으나, 권세연의 의병장 사퇴 이후 2차 안동의진에서는 김도화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김흥락과 함께 지휘장을 맡아 여러 문중의 힘을 단합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1902년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임명되었으며, 향년 84세로 1906년(고종 10년) 7월 17일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