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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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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기의 하회
하회별신굿탈놀이 무형문화재 지정
1940년 송석하가 찍은 하회탈놀이 사진으로 각시와 중, 양반, 초랭이, 이매 등이 등장하고 있다.
1940년 송석하가 찍은 하회탈놀이 사진으로 각시와 중, 양반, 초랭이, 이매 등이 등장하고 있다.

1964년 하회탈의 국보 지정과 같은 국가적인 차원의 관심과 함께 안동지역 자체에서도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복원해야 한다는 논의가 확산되었다. 1958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가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1970년대 당시 탈춤부흥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1973년 하회가면극연구회가 만들어지고 새롭게 하회별신굿탈놀이가 복원되기에 이른다. 1973년 하회가면극연구회는 유한상의 후원 아래 염순규, 김수진, 이재호, 이상호 등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상호는 초등학교 때부터 성대묘사 등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소위 원맨쇼 등을 하면서 안동지역에서는 상당히 알려진 연예인이었다. 그는 유한상으로부터 고등학교 때 하회별신굿 대사본을 받고 이를 연극으로 만들어보려고 노력한다. 처음 모임은 1973년도 6월경에 시작되었는데 탈춤을 위하여 모인 것이 아니라 안동지역의 좋은 전통소재를 가지고 연극을 만들기 위하여 모였다고 한다.

이러한 가운데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이슈로 떠오르게 되었고, 이에 가면극을 하기 위하여 당시 춤을 강습하고 있었던 오숙자씨를 영입하고 그의 문하생들을 모두 춤꾼으로 가입시켰다. 가면극을 연행하자면 춤과 대사가 함께 나가야 하는데, 1958년 당시 대구 국악학원 팀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공연을 보지 못하고 다만 이야기로만 전해들은 까닭에 정확하게 춤을 재현해 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당시 이상호는 장터 혹은 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경상도식 춤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면밀한 연구를 거듭했다고 한다. 이때 소위 몽두리춤, 엇박자춤 등이 회원들 사이에서 기본적인 춤사위로 공유되고, 어느 정도 틀거리를 만들어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1973년 10월 23일에 문화회관(당시 관장이 유한상이었음)에서 12-3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하회가면극연구회로 창립총회를 가졌다. 이때 연희부장은 이상호, 총무는 이재호, 회장은 염순규가 담당한다.

한편 하회별신굿탈놀이를 연행하기 위해서는 탈과 의상 등이 필요하였다. 탈은 당시 홍익대 조각과를 나온 주상찬씨가 한 벌을 제작하여 연구회에 기증하였다. 그리고 탈춤에 필요한 의상은 회원들이 갹출하여 구입하였다. 1973년 프랑스 대사의 안동 방문 때 가면극연구회 회원들이 하회별신굿탈놀이 첫 공연을 하면서 본격적인 복원이 시작되었다. 또한 1974년 10월 낙동강변에서 벌어진 경로잔치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 공연이 이루어졌다. 또한 이 당시부터 유한상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으면서 문화재 지정의 꿈을 키워갔던 것으로 판단된다.

1973년 연구회가 만들어진 후 우여곡절이 많았다. 탈춤이 새롭게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회원들이 많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주변 인물들을 끊임없이 접촉하고 연구회로 끌어들이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다가 하회별신굿탈놀이의 마지막 연희자로 알려진 이창희옹을 찾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창희옹을 찾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이상호, 김수진 등은 이창희옹을 찾기 위하여 장터마다 찾아가서 탈춤을 추며 옷과 잡화를 팔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고 한다. 특히 풍산, 풍천을 중심으로 장터를 많이 다녔는데 그것은 하회와 인접한 장터를 탈춤을 추고 다니다 보면 이창희옹과 같은 생존 연행자나 구경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74년 경에 이창희 옹을 찾게 되는데, 이때부터 하회별신굿탈놀이에 대한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할 수 있게 된다. 기존의 유한상 대본을 보다 다듬고 하회가면극연구회원들 역시 복원공연을 계속하여 시도한다. 당시 안동민속축제와 문화회관에서 이루어진 공연은 하회탈춤의 전형을 구축하는 데 상당한 진척을 가져오게 했다. 성병희의 기록에 따르면, “1928년의 마지막 별신굿 때 각시탈을 맡아 놀았던 이창희[李昌熙 : 아명 재수(再壽), 1912년생, 작고]옹에 의해 하회별신굿의 많은 의문이 풀리고, 원형에 근접한 전승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창희옹의 구술에 따라서, 1928년에 놀았던 별신굿 때의 내용과 실태가 밝혀졌고, 마당의 순서와 내용, 춤사위와 가락, 그리고 의상과 소도구에 이르기까지, 드물게 기억력이 좋은 이옹에 의하여 확인되었다”고 한다.

하회별신굿탈놀이가 고정적인 전형성을 가지게 된 것은 1978년 민속예술경연대회를 기점으로 볼 수 있다. 춘천에서 열린 경연대회에서 경상북도는 대통령상을 수상하기 위하여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다시 재복원하여 출전시키게 된 것이다. 이로써 당시 이창희옹이 구술한 내용으로 대본과 판이 다시 정리되었고 춤사위와 가락을 본격적으로 연습한다. 경상북도와 안동시의 재정 후원으로 1978년 10월 19일 경연에 참여하기 전 여름에 보름동안 지례에서 합숙을 하는데, 이때 상당부분 하회탈춤의 판세와 춤, 대사가 고정되기에 이른다.

한편 이때 하회별신굿탈놀이가 복원된다는 사실이 각지에 알려지게 되었고, 심우성씨 등이 안동을 찾게 된다. 춘천민속예술경연대회 문화공보부장관상 수상을 거치고, 국립영화제작소가 해외홍보용으로 만드는 영화를 제작하면서, 전통사회에서 하회마을을 배경으로 연행되었던 하회별신굿탈놀이의 가치를 더욱 인정받게 되었고, 1980년 11월에 중요무형문화재 69호로 지정받는다. 그리고 이때 지정은 1978년 민속예술경연대회 공연을 중심으로 한 내용으로 고정되었다.

현재 보존회는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지역의 문화예술단체로서 위상을 높이고, 1997년도부터 시작된 상설공연을 통해 지역주민 및 관광객들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으며, 잦은 해외공연과 외부 공연을 통해 문화상품적 가치를 높이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이제는 국가주의적인 전통담론이나 내 고장 가꾸기의 담론이 아닌 철저한 경제적 기제로 옮아가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