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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씨터전에 안씨문전에 류씨배판
허씨터전에 안씨문전에 류씨배판
허씨터전에 안씨문전에 류씨배판

풍산류씨 이전에 이미 김해 허씨, 광주 안씨가 살고 있었음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향언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온 가장 명쾌한 하회마을의 역사라 할 수 있다.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란 말에서 터전이나 문전은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배판이란 용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배판이 아니라 ‘배반(胚盤)’이라는 것이다. 배반이란 알의 노른자 위에 희게 보이는 원형질로서 조류나 파충류의 몸체를 만드는 아주 중요한 부분을 말한다. ‘알눈’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곧 허씨와 안씨들이 마을의 기초공사를 했다면 그곳에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씨족은 풍산 류씨라는 말이다. 하회는 류씨의 명당이란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려 말에 정승을 지내던 김해 허씨 한 분이 조정에서 물러나 팔도의 경치좋은 곳을 유람하다 안동을 경유하게 되었다. 하회의 터가 너무나 좋은 나머지 웃골 거먹실(남산 팔선대 맞은편 지역)에 살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은 강 건너 건짓골에 허정승의 묘가 있어 그분의 자손인 김해 허씨들이 묘소를 찾기 위해 몇 번이나 왔다 갔다는 점과 하회탈을 만들었다고 알려진 허도령 역시 김해 허씨인 점에서 확인된다.

허씨들이 터를 잡고 산지 백여년 뒤 광주 안씨 안성이란 분이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각 고을을 순시하던 중 하회에 와서보니 산수가 너무나 좋아 화산 기슭 향교골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했다. 천곡 안성이란 분의 아들 안종생은 사헌부 감찰까지 지냈는데 배소의 사위이기도 하다. 『광주안씨대동보』에 의하면 안성은 전서공(류종혜)과 동시대 인물이기 때문에 전서공이 고개 밖(현외)에 터를 잡던 시기와 같은 때에 하회에 와서 살기 시작한 게 아닌가 판단된다. 안씨는 하회에 들어와 35대까지 내려왔다는 것만 보아도 그 역사가 유구했음을 알 수 있다. 안씨들이 피를 천석이나 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부용대로부터 부계 쪽으로 만여평이나 광활하게 펼쳐진 농토에서 수확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갑술년(1934) 대홍수에 모두 유실되고 말았다 한다.

이후 풍산류씨들이 입촌하여 점차로 번성하게 되자 허씨들이 먼저 한두집 떠나고 이어서 광주 안씨들이 뒤를 이었다. 그리하여 하회마을은 류씨 집성촌으로 자리잡으면서 대촌으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풍산 류씨들이 하회에 자리를 잡으면서 얼마 안 되어 벼슬길이 열렸다. 중종대에 입암 류중영(1515-1573)은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고, 이분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바로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 선생이 그들이다. 결국 류씨 배판 또는 배반이란 말처럼 찬란한 풍산류씨의 시대를 열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