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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하회의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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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에서 현종손에 이르기까지
양진당

풍산류씨 하회마을 입향조인 류종혜는 시조 류절의 6세손이다. 이후 9世에 이르러 장남인 아닌 차남 류소로 이어진다. 족보에 따르면 장남 류야거는 후손 없이 일찍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류소에게는 아들 형제가 있었는데, 양진당 종가는 차남인 류자온으로 이어진다. 족보를 확인해본 결과, 장남 류자형은 4세손에 이르러 딸 둘을 둔 상태에서 절손(絶孫)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류자온은 길안면 묵계마을의 안동김씨 보백당 종가의 시조인 김계행(金系行)의 사위이다. 류자온의 손자가 류중영(호는 立巖)이다. 『명종실록』에 따르면 류중영은 ‘강직하고 명철하여 번거로운 일을 능숙히 처리하는 재주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그는 명석한 사리판단과 탁월한 행정처리 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류중영은 안동시 법흥동 고성이씨 임청각 종가 이원(李原)의 사위이기도 하다. 류중영에게는 아들 형제가 있었는데, 장남이 류운룡(호는 謙庵)이고 차남이 류성룡(호는 西厓)이다. 이들 형제의 혈통은 겸암파와 서애파로 각각 나뉘어져 양진당 종가와 충효당 종가로 이어져 내려간다. 풍산류씨 하회마을 입향조인 류종혜는 시조 류절의 6세손이다. 이후 9世에 이르러 장남인 아닌 차남 류소로 이어진다. 족보에 따르면 장남 류야거는 후손 없이 일찍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류소에게는 아들 형제가 있었는데, 양진당 종가는 차남인 류자온으로 이어진다. 족보를 확인해본 결과, 장남 류자형은 4세손에 이르러 딸 둘을 둔 상태에서 절손(絶孫)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류자온은 길안면 묵계마을의 안동김씨 보백당 종가의 시조인 김계행(金系行)의 사위이다. 류자온의 손자가 류중영(호는 立巖)이다.

양진당

류운룡은 15세 되던 해에 아우 류성룡과 함께 퇴계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는데, 당시 퇴계는 그의 학문적 자질을 높이 평가하여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것으로 전한다. 류운룡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독서와 사색에 정진하고자 29세의 나이에 부용대 기슭에 서재를 지어 학문에 몰두하였다. 당시 퇴계는 그의 정자를 겸암정(謙巖亭)이라 이름 지어준 후 손수 현판을 써서 보내주면서 “그대가 새 집을 잘 지었다는데, 기꺼이 가서 같이 앉아있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여 아쉽네”라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류운룡은 겸암을 자신의 호로 삼게 되었다. 관직에 큰 관심이 없었던 류운룡은 부친의 간곡한 뜻에 따라 음직(蔭職)으로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게 되며, 임진왜란 때는 풍기군수의 자격으로 의주에 위치했던 행재소까지 정조문안사(正祖問安使)를 파견하기도 했다. 현재 우곡서원과 화천서원에 배향되어 있으며, 불천위로 지정받아 양진당 종택의 사당에 모셔져 있다. 류운룡의 현손인 류후창은 녹천면 원천마을의 진성이씨 반초당 종가의 이명익(李溟翼)의 사위이다. 이후 양진당 종가는 현종손 류상붕에 이르고 있다. 류운룡은 15세 되던 해에 아우 류성룡과 함께 퇴계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는데, 당시 퇴계는 그의 학문적 자질을 높이 평가하여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것으로 전한다. 류운룡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독서와 사색에 정진하고자 29세의 나이에 부용대 기슭에 서재를 지어 학문에 몰두하였다. 당시 퇴계는 그의 정자를 겸암정(謙巖亭)이라 이름 지어준 후 손수 현판을 써서 보내주면서 “그대가 새 집을 잘 지었다는데, 기꺼이 가서 같이 앉아있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여 아쉽네”라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류운룡은 겸암을 자신의 호로 삼게 되었다. 관직에 큰 관심이 없었던 류운룡은 부친의 간곡한 뜻에 따라 음직(蔭職)으로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게 되며, 임진왜란 때는 풍기군수의 자격으로 의주에 위치했던 행재소까지 정조문안사(正祖問安使)를 파견하기도 했다. 현재 우곡서원과 화천서원에 배향되어 있으며, 불천위로 지정받아 양진당 종택의 사당에 모셔져 있다. 류운룡의 현손인 류후창은 녹천면 원천마을의 진성이씨 반초당 종가의 이명익(李溟翼)의 사위이다. 이후 양진당 종가는 현종손 류상붕에 이르고 있다.

양진당계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