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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본관이 풍산(豊山)으로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외가인 의성(義城) 사촌리(沙村里)에서 아버지 류중영과 어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 김광수(金光粹)의 따님과의 사이에 태어났다. 조부는 류공작(柳公綽)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66년 별시(別試) 병과에 급제 후 본격적으로 관직에 나아갔는데, 내관으로는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禮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館)을 시작으로 대사간(大司諫),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 예조판서(禮曹判書), 경연춘추관동지사(經筵春秋館同知事),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우의정(右議政),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 도체찰사(都體察使),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외직으로는 상주목사(尙州牧使), 경상도관찰사(尙道觀察使)를 지냈다.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고, 다음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8년(선조 1) 대교, 다음해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뒤 정언·병조좌랑·이조좌랑·부교리·이조정랑·교리·전한·장령·부응교·검상·사인·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지제교로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을 겸하고,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에는 부제학에 올랐다. 1582년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하여 왕명을 받고 「황화집서(皇華集序)」를 찬진(撰進)하였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備邊五策)」을 지어 올렸으며, 그해 함경도관찰사에 특제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어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제학을 겸하였으며, 다음해 왕명으로 「정충록발(精忠錄跋)」을 지었고, 또 그 이듬해에 『포은집(圃隱集)』을 교정하였다.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왕명을 받아 「효경대의발 孝經大義跋」을 지어 바쳤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당파 싸움이 시작되어 반대파의 모함을 받은 류성룡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24년간의 벼슬 생활을 미련 없이 청산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으로 가던 중 어머니가 태백산 밑에 있는 도심촌으로 피난갔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가 어머니를 하회로 모셨다.

류성룡은 17세에 혼례를 올렸는데, 신부 이씨는 현감 이경(李坰)의 딸이며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이었다. 선조 40년(1607) 그의 나이 66세에 병석에 눕자 왕은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케 하였다. 그는 빌렸던 서적을 돌려주고 가족들에게 박장(薄葬)을 하라는 유언을 한 후 최후로 임금께 올리는 유소(遺疏)를 초하고 5월 6일 세상을 떠났다. 안동부 서쪽 수동리(壽洞里)에 예장(禮葬) 되었다.

부음이 전해지자 왕은 정사를 폐하고 서울의 사대부와 시장 상인들은 그의 옛 집터에 모여 신위를 배설하여 곡하였고 대신의 초상에는 3일간 철시하는 것이 예였으나 하루를 더하여 서민들도 백건(白巾) 을 쓰고 곡하였다. 인조 때에 문충(文忠)의 시호가 내려졌고 호계서원(虎溪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류성룡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함에 실천에 힘썼으며, 몸가짐이 근엄장중하여 집안사람들조차 그가 기대어 앉거나 게으른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일찍부터 경국제세(經國濟世)에 뜻을 두어 예악(禮樂)으로부터 치병(治病) 이재(理財)에 이르기까지 깊이 깨치지 않은 데가 없었으며, 성리(性理)에도 깊은 연구를 하여 퇴계 학맥의 한 갈래를 이루었다.

서애는 학문을 함에 있어서 경전(經傳)의 요지와 성현의 심법을 밝혀, 글을 읽음에는 옛사람의 주석에 얽매이지 않고 되도록 자유로운 해석을 하려 힘썼다. 그러므로 경전을 숙독 완미하여, 스스로 그 뜻을 완전히 해득한 뒤에라야 주석을 보고 자기의 해석과 비교해 보곤 했다.

류성룡은 스승인 퇴계 이황의 학설에 따라 이기론(理氣論)을 펼치고 양명학을 비판했으며 이황의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좇아 기(氣)는 이(理)가 아니면 생(生)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여 기보다 앞서 있는 실체로서의 이를 규정했다.

류성룡은 양명학의 핵심적 이론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과 치양지설(致良知說)이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 지나치게 곧아진[矯枉而過直]’ 폐단에 빠진 것으로 불교의 학설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하나에 치중됨이 없이 병진해야 한다는 지행병진설(知行竝進說)을 주장했다.

그가 남긴 저작 중 『징비록(懲毖錄)』참혹한 국난의 하나였던 임진왜란에서의 아픈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 그러한 수난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하기 위하여 남긴 저술이다. 임진왜란의 전모를 정확하고 생생하게 비춰주고 있어 임진왜란에 관한 많은 기록 가운데서도 귀중한 사료(史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