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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진

류진(柳袗; 1582-1635)은 본관이 풍산(豊山)으로 자는 계화(季華)이고 호는 수암(修巖)이다. 아버지 류성룡(柳成龍)과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 이경(李坰)의 따님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류중영은 관찰사를 지냈고 풍산부원군에 추증되었으며, 증조부 류공작(柳公綽)은 간성군수를 지냈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고조부 류자온(柳子溫)은 진사이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류진은 나면서 자질이 아름다웠고 겸손하고 후덕하며 단정하고 정직하였다. 총명함이 일찍 이루어졌으며 식견이 고원했다. 8살에 어머니 정경부인 이씨가 세상을 뜨자 여막을 떠나지 않고 두 형님을 도와 음식을 차리고 초상에 올리는 것을 마치 어른과 같이 했다.

11세에 왜란을 만났는데, 아버지인 류성룡이 어가를 호위하여 몽진을 떠난 뒤 자형 이씨를 따라 영동 산골짜기로 피란했는데, 왕왕 도적을 만나 죽을 뻔하였으나 계책을 내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왜란이 안정되어 아버지가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아침저녁으로 곁에서 경전의 뜻을 배우고 물어 옛 사람들의 학문의 요체를 들었는데, 마음으로 이해하고 묵묵히 터득하여 얻은 것이 많았다. 류성룡이 일찍이 칭찬하며, “너처럼 아름다운 자질은 얻기 힘든데 퇴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616년(광해군 8) 유일(遺逸)로 천거되었는데, 내관으로는 형조정랑(刑曹正郞)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봉화현감(奉化縣監)과 영천군수(永川郡守)를 역임했다.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 총부부총관(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에 추증되었다.

인조반정 직후 봉화현감에 임명되어서는 봉화현 향리들의 작폐를 척결하는 데 힘썼다. 봉화는 땅이 척박하고 향리들의 협잡으로 백성의 살림이 매우 피폐하였다. 류진은 토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관내의 토지를 일제히 다시 조사하여 과세 대상에서 빠져 있던 토호들의 토지를 모두 밝혀내어 세수가 많이 늘고 백성들의 부담이 줄었다. 정성을 다해 다스린 보람으로 백성의 형편이 날로 나아져 고향을 버리고 떠돌던 백성들이 돌아와 다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호구가 배로 늘어났다.

1628년(인조 6) 예천군수로 임명되었을 때 예천이 고향과 가까워서 친척들이 청탁을 많이 하였으나 처신을 엄격히 처신하여 한사람도 법에 저촉되는 바가 없었다.

아버지인 류성룡(柳成龍)과 정경세(鄭經世)에게서 배웠고 김영조(金榮祖), 김령, 이준(李埈), 김광계(金光繼) 등과 교유했다.

남긴 저작으로는 문집인 『수암집』과 한글본 일기인 『임진록』및 『임자록』이 있다. 『임진록』은 임진왜란 당시 피난 일기이며,『임자록』은 1612년 일어난 김직재옥(金直哉獄)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을 때 쓴 것이다.

특히, 『임진록』은 류진의 나이 열한 살 때 그해 4월 서울을 떠나 11월 사이에 겪은 피난 기록이다. 그의 조모는 백부인 겸암 류운룡이 모시고 피난을 떠났고, 그는 종자형인 이문영(李文英)의 가족을 따라 경기도 동부와 강원도 일부지역인 영동지역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임진록』은 그 체험을 술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