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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414호 충효당

보물 414호로 지정된 풍산 류씨 서애파 종택. 서애 선생이 농환재(풍산읍 서미리)에서 별세한 뒤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장손인 졸재 류원지 어른이 유림들의 도움을 받아 창건하였다 한다. 현판은 우의정을 지낸 미수 허목의 친필이다. 조선 중기 이름난 문신이었던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의 집(풍천면 하회리 656)으로 보물 제 414호(1964.11.14)에 지정되었다. 유성룡 선생은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고 임진왜란 때에는 영의정으로 전쟁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데 많은 공헌을 한 분이다. 선생이 쓴『징비록』과『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도 평가 받고 있다.

충효당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손자인 졸재 유원지(1598∼1674)가 짓고, 증손자인 눌재 유의하(1616∼1698)가 확장 수리한 것이다. 행랑채는 8대손 일우 유상조(1763∼1838)가 지은 건물로 대문과 방,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을 앞면으로 긴 행랑채를 두고 안쪽으로 ㅁ자 모양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가 연이어 있다. 사랑채는 남자 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들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왼쪽에서부터 사랑방, 대청마루, 방,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면서 집안 살림을 돌보던 공간으로 동북쪽에 부엌을 두고 ㄱ자로 꺾여서 안방, 대청, 건넌방이 있다. 또한 건넌방 앞에는 마루와 2칸의 온돌방, 부엌이 있으며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 대청에 걸려 있는 ‘충효당(忠孝堂)’이라고 쓴 현판은 명필가였던 미수 허목(1595∼1682)이 쓴 것이라고 한다. 비교적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행랑(行廊)채에 달린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의 대청 앞으로 나오게 된다. 이 사랑채는 앞면6간 측면2간 규모인데, 향해서 오른쪽 4간은 대청이 되고 왼쪽2간은 내부를 구분하여 온돌방3개를 들여 놓았다. 한편, 대청 중앙뒷면에도 간을 막아 방 하나를 들여 놓았다. 대청 앞면과 측면에는 난간이 있는 툇마루가 있고, 기둥은 두리기둥이나 내부와 방에는 모기둥을 세웠다. 두리기둥 위에는 초익공(初翼工) 계통의 공포(공包)를 배치하였으나 첨차와 봇머리는 조각적인 가공을 하지 않고 네모지게 잘라 놓았다.

사랑채 온돌방 옆에 대문간(大門間)이 있어서 안채로 들어가게 되는데, 건물은 안뜰을 둘러싸고 구자형(口字形) 평면으로 배열되어 있다. 제일 안쪽에 있는 내당(內堂)은 대청과 방 앞에 퇴간이 있고 높은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그 위에는 이익공(二翼工) 계통의 공포를 배치하였다. 쇠서는 생략되어 운공(雲工)처럼 초각(草刻)되었을 뿐이지만, 벽면(壁面)에 나온 두공(頭工) 첨차는 제법 형태를 갖추어 사랑채보다는 공포의 구조가 훨씬 정교하다. 기둥 사이 창방(昌枋) 위에는 화반(花盤)을 하나씩 받쳤으나, 그 솜씨는 공포보다 못하며 네모난 부재(部材)를 썼을 뿐이다.

안동의 폐쇄형 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안채 안방은 3칸이며, 대청은 4칸의 넓이를 가지고 있다. 안방과 대청은 천장이 높으며, 다락을 두었다. ㅁ자형 안채 서변은 반 빗간으로 아래는 주방으로 상층은 수장용으로 사용된다. 대청 왼쪽 큰 사랑방은 2칸통 2칸 규모이며, 오른쪽도 반칸 크기의 온돌방이다. 서편 온돌방 전퇴의 서벽은 판벽하고 바라지창을 시설하였다. 불천위를 지내는 사당과 유물전시관인 영모각의 시설이 있다. 행랑채 앞마당에는 다소 원형이 손상된 불탑이 복원되어 있다. 사당 앞으로 만지송이 펼쳐져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국난 극복에 앞장섰던 문충공(文忠公)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선생의 종택이다. 선생이 삼칸 초옥(草屋)인 농환재(弄丸齎)에서 별세한 후 선생의 유덕(遺德)을 기리는 수많은 유림들의 도움을 받아 장손인 졸재 원지(元之)공이 처음 창건하였고, 그의 아들 의하(宜河)공이 확장 중수한 조선 중엽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다. 충효당 전서체(篆書體)현판은 조선 중기의 명필인 우정 미수 허목(眉受 許穆)의 친필이다. 충효당 기문은 1706년(숙종 32)에 식산 이만부(息山 李萬敷)가 지은 것을 282년 뒤인 1988년에 임창순(任昌淳)의 글씨로 게판했다. 충효당이란 당호는 서애 선생의 증손자인 익찬 벼슬을 역임한 우눌재 류의하(愚訥齋 柳宜河)대에 이만부에게 청해 완성되었다.

〈충효당 기문〉(국문 번역)

영가는 동남에서 경치가 빼어난 곳인데 하회는 더욱 알려졌다. 대체로 그 산수가 밝고 수려하여 조화를 쏟아 부은 듯한 의심이 든다. 그 인물을 논하면 서애 문충공 선생이 대대로 이 곳에 거주하더니, 선생의 증손 익찬공(翊贊公)에 이르러 집을 일으켜 세워 그 당을 이름하여 ‘충효(忠孝)’라 하고, 한가할 때 독서하거나 친우를 맞이하거나 자제들 교육을 이 곳에서 한다. 옛사람들이 당을 이름하는 데는 표면적인 이유가 두 가지 있고 내면적인 이유가 두 가지 있는데, 예컨대 지명을 게시한다거나, 혹은 완상할 만한 사물을 표방하는 경우는 외적인 것이고, 언어에 기탁하여 자기의 뜻을 드러내거나 이전의 가르침을 서술하여 부족한 바를 힘쓰는 것은 모두 내적인 것이다. 충효와 같은 것은 타고난 본성에 근본하고 덕을 행함에 드러나니 성인이라 하여 보탤 것이 없고 우자라고 해서 폄하할 것도 없이 본시 지니고 있다. 어찌 당의 이름으로 삼은 뒤에야만 되는 것인가? 선생께서 자손에게 내린 시 1편을 상고해 보면 선생의 선한 말로도 후손에게 곡진하게 훈계를 내린 것이 충효 두 자를 벗어나지 않았으니, 익찬공이 특별히 이 당호를 게시함이 또한 이치에 마땅하지 않는가? 선생의 갸륵한 효성은 어버이를 섬기고 형에게 공경할 때 나타나고, 밝고 밝은 의리는 쓰면 나아가고 버리면 물러나는 사이에 드러나, 이러한 까닭에 공은 사직을 보존하고 혜택은 백성에게 두루 미쳤다. 전(傳)에 이르기를 “군자는 가정을 벗어나지 않아도 나라에 교화를 이루어 나간다”하니 선생께서 이와 같았다. 이로부터 주손들이 대대로 청백을 전수하고 시서를 업으로 삼아, 힘쓸 바는 어기지 말고 상례를 신중히 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라는 훈계에 있었는데, 다만 다시 크게 드러내어 이를 미루어 나가지 못하여 징험할 길이 없다. 그러나 선생의 손자 졸재공은 나라가 크게 저상되어 조정이 문란하고 사방에 함정이 쳐져 있을 때 재야에 있는 처지인데도 분연히 붓을 뽑아 요를 존숭하는 의리를 드러내어 대통이 이로 인해 밝아지고 인륜이 이로 인해 떨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으로 선생을 계승한 것인저! 성인에 버금가는 맹자가 언어로 위대한 우임금의 공과 나란한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아아, 익찬공이 특별히 ‘충효당’이라 게첨한 것이 또한 이치에 합당하다. 나는 더러 익찬공을 곁에서 모신 적이 있다. 공께서 80세를 넘긴 나이였는데 머리는 학처럼 허옇게 세었으나 얼굴은 동자처럼 윤기가 돌았다. 진실되고 후덕하며 단아하고 신중한 모습은 멀리서 바라보면 공경스럽고 가까이서 대해 보면 온화한데, 남과 이야기 할 때는 정다웠고, 예스럽되 속되지 않으며, 여러 자제들과 응대함에 오직 조심하여 전형이 또한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상감이 즉위한 지 32년 겨울에 류성화(柳聖和) 개중(介仲)이 식산으로 찾아와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개중은 곧 익찬공의 손자인데, 선생의 제사를 주관하는 자다. 나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어떻게 감당하겠는가마는, 그러나 내가 다행히 이 가문에 사위가 되어 성명을 현판에 써서 선생의 시와 함께 충효당에 걸리면 스스로 영광스러운 일이라 생각되어, 마침내 끝까지 사양치 못하고 이미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진술하고 인하여 한 마디 말을 덧붙인다. “자손이 이 집에 살면서 가르침을 계승함이 어찌 다른 데에 있는가? 선생의 글만 읽을 뿐 아니라 선생의 도를 배워야 하며, 선생의 글만 읽을 뿐만 아니라 선생이 읽었던 성현의 글을 읽어야 하며, 선생의 도를 배우는데 그칠 뿐 아니라 선생이 배운 바의 성현의 도를 배워야 한다. 도는 전체요, 충효는 하나의 일이요, 글은 도의 그릇이니, 글을 통해 도를 구하면 충효는 실행되는 것이다. 단지 일의 한두 가지에만 구애되어 그 근본을 버리고 운운 하는 것은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다”하니 개중이 “삼가 잘 알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아울러 써서 돌려보낸다. ----- 숙종 32년 병술 겨울에 연안 이만부 짓다

모두 52칸이 남아 있으며, 종택에는 가장 신선한 공간인 불천위 사당과 유물전시관인 영모각이 있다. 불천위 사당 앞에는 일명 만지송이 장관이며 종택 행랑채 앞마당에는 다소 원형이 손상된 불탑이 복원되어 있는데, 이탑은 원래 서애선생의 재사인 상로재(霜露齋) 뒷편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