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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허씨
허씨터전에 안씨문전에 류씨배판
허씨터전에 안씨문전에 류씨배판

풍산류씨 이전에 김해 허씨, 광주 안씨가 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김해 허씨들은 가장 먼저 하회마을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선주민이었다. 먼저 터를 잡은 김해 허씨들은 화산 남쪽 기슭의 거묵실골에 처음 터를 잡고, 다음으로 터를 잡은 광주 안씨들은 화산 북쪽 기슭인 행개골에 자리를 잡았다. 가장 마지막에 터를 잡은 류씨들은 지금의 하회 곧 화산의 산자락이 밋밋하게 화천까지 내려와 마무리 된 하안(河岸)에 터를 잡았다.

17세기 중엽까지만 하더라도 동원록(洞員錄)에 허씨 몇 사람과 안씨 소수가 함께 수록되어 있어 조선 중기까지는 이들 세 성씨가 마을에 함께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하회에 입촌한 순서에 따라 허씨, 안씨, 류씨들이 차례로 마을을 석권하며 마을의 중심부도 성씨별 모둠살이에 따라 이동되다가, 같은 순서로 쇠퇴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류씨들이 하회의 중심부를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먼저 터를 잡은 허씨들과 관련해서 허도령 전설이 전승되고 있다.



“옛날에 마을의 허도령은 꿈에 서낭신의 계시를 받고 탈을 만들기 시작했다. 탈을 만드는 곳에는 다른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도록 금줄을 치고 매일 목욕재계하며 지극 정성을 들이는 가운데 탈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허도령을 몹시 사모하는 김씨 처녀가 있어 그 사모하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하루는 허도령의 얼굴이나마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어서, 금기를 깨고 금줄을 넘어서 탈막 안을 엿보았다. 입신 지경에서 탈을 깎고 있던 허도령은 그 길로 피를 토하고 쓰러져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마지막으로 깎고 있던 이매탈은 제대로 마무리할 수 없어서 턱이 없는 탈이 되고 말았다. 허도령이 죽자 처녀도 번민하다가 따라 죽었다. 마을에서는 김씨 처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화산의 상당에 서낭신을 모시고, 허도령의 영혼은 큰고개 성황당에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올렸다.”



이 전설을 통해서 토착 주민인 허씨가 탈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서 별신굿의 형성과 탈춤의 전승은 안씨가 이 마을에 입주하기 전에 허씨들이 마을에 터잡고 살 때부터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 준다. 서낭당과 같은 동신당들이나 동제와 같은 여러 공동체 단위의 제의도 허씨들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하겠다. 광덕동 건지골(乾池谷)에 있다고 하는 허정승 묘가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방증자료가 될 수 있겠다.

서낭당의 당신이 된 처녀는 당시 17세로서 무진생 의성 김씨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무진생 서낭님' 또는 김씨 할매라고 일컬어지며 축문에는 '戊辰生城皇님'으로 기록한다. 친정은 하회의 이웃 마을인 월애(풍천면 인금동 다릿골)이며 외가는 갈밭(풍천면 갈전동)이라고도 한다. 더러 별신굿을 할 때 친정이나 외가에서 초청을 하게 되면 그 마을에 가서 탈춤을 추기도 했다. 당시에는 이웃에 있는 의성 김씨들과 허씨들 사이에 문화적 교류가 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