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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원지
졸재선생연보목판인출본
졸재선생연보목판인출본

류원지(柳元之; 1598-1678)는 본관이 풍산(豊山)으로 자가 장경(長卿)이고 호는 졸재(拙齋)이다.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아가 내직으로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고, 외직으로 황간현감(黃澗縣監)과 진안현감(鎭安縣監)을 지냈다. 서애 류성룡의 순자로 아버지 류여와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 군자감정(軍資監正) 홍세찬(洪世贊)의 딸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3남 2녀의 자식을 두었는데 장남 류의하(柳宜河)는 봉화현감(奉化縣監)을 지냈으며, 차남 류중하(柳重河)는 벼슬을 하지 않았고, 막내 류만하(柳萬河)는 승의랑(承議郞)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장녀는 사인(士人) 권징에게 시집을 갔고, 차녀는 이재건(李在建)에게 시집갔으나 남편이 일찍 죽어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1774년 77세의 일기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며, 화천서원(花川書院), 인화서원(仁化書院)에 배향되었다.

어려서부터 맑고 순수한 마음과 눈과 같이 흰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8세에 이르러 조부 류성룡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지극한 성품에 영특하고 단아한 모습까지 갖추어 류성룡이 기특하게 여기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조부가 세상을 뜨자 작은아버지 류진(柳袗)에게서 수학하였다. 심학(心學)의 요체와 서로 주고받은 뜻에 이르러서는 남들이 미칠 수 없는 순수한 덕성까지 갖추었다. 17세에 의성김씨 김시추(金是樞)의 딸과 혼인하였다.

30세에 향시에 합격하고, 33세에 음직(蔭職)으로 창락도(昌樂道)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37세에 사헌부감찰이 되었으나, 다음해 작은아버지 류진이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돌아온 후 복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질되었다.

1636년 나이 39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안동지방의 의병장 이홍조(李弘祚)와 함께 의병진의 일을 돕는 큰 활약을 하였다. 40세에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를 거쳐 41세에 황간현감(黃澗縣監)이 되어 그 곳 백성들을 구휼하다가 5년의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12년 동안 고향에서 지내다가 58세 때 진안현감(鎭安縣監)에 임명되었다. 62세에는 어머니 상(喪)을 당했으며, 65세에 이르러 와서(瓦署) 별제(別提)로 임명받았고, 66세에는 장악원(掌樂院) 주부(主簿)가 되었으나 그해 7월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다시 안기찰방을 제수받아 3년 동안 직책을 수행하였다. 그러던 중 예송과 관련하여 「영남의례소(嶺南儀禮疏)」를 지어 영남 유생 1,400여 명의 연명 상소를 올렸다가 경질되기까지 하였다. 이후 고향에서 지내면서 여생을 보내다가 1774년 7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명오(明悟)하여 뜻을 독실히 하여 학문에 힘써서 부형이나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아는 것이 있었다. 문장을 씀에 있어서는 정미롭고 절실하여 이치가 있었다.

늦게는 역학(易學)을 좋아하여 도(圖) 와 괘(卦)를 연구하여 자득한 것이 많았는데 도설(圖說) 한 권을 지어서 집안에 갈무리 하였다. 두 번이나 생원 진사시에 합격 하였으나 예조(禮曹)에서 치루는 재시(再試)에는 합격하지 못하였다.

타고난 바탕이 순후하여 밖으로 꾸미지 않았고 남과 다툼이 없었으며, 지나치게 즐기고 좋아하는 바도 없었다. 가난함에 편안해 하고 분수를 지켰으며, 부형을 섬김에 있어서 효성과 우애를 다하였고 집안과 마을에 처해서는 화목하고 부드럽게 대했으며, 죽을 무렵에 이르러 글을 남겼는데 오직 제물(祭物)을 가볍게 하고 윤리를 중시하라는 것으로 경계를 삼았다.

평생 남들에 이어서 가타부타 하지 않았고 흉중이 맑고 깨끗하였기 때문에 하양(河陽) 금응협(琴應夾)이 일찍이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월천 조목이 그의 지석을 썼는데 ‘참된 것을 품고 박옥을 가졌으며 새기지 않고서야 어찌 다듬을 수 있으랴. 휴휴(休休)하게 처하였으며 유유하게 사귀었네. 마음속이 깨끗하여 죽을 무렵 집안에 훈계하기를 그 넉넉함을 쌓으라 하였네’라고 하였다.

아산(牙山) 장씨(蔣氏)에게 장가들어 3남을 두었으니 종화(宗和), 종직(宗直), 종개(宗价)이다. 류종개는 을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이 서울이 함락되자 상복을 입고 있었으나 의병을 모와 그들을 거느리고 안동의 임현(任縣)인 춘양에 진을 치다 왜적과의 격전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 당시 감사가 조정에 보고하여 참의에 증직되었다.

외향인 예안(禮安)에 살았다. 녹전(祿田) 마곡서원(磨谷書院)에 제향되었다.

류원지는 조부인 류성룡(柳成龍)과 숙부인 류진(柳袗)으로 부터 가학을 이어받았는데 퇴계 이후 이기설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주로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동조하는 입장에 서서 율곡 이이(李珥)의 설을 반박했을 뿐 아니라 퇴계의 경(敬) 사상을 계승하였다. 특히 75세 때에는 수양 공부에 경계가 될 만한 격언들을 모은「벽상자경문(壁上自警文)」을 지어 벽에 걸어 두고 나태해지는 마음을 바로잡고 삶의 지침으로 삼았다.

그는 특히 당시 실천적 유학이었던 예설에 조예가 깊었는데, 영남 유림을 대표하여 「영남의례소(嶺南儀禮疏)」를 지어 효종의 복상 문제(服喪問題)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다. 동시에 『상례고증(喪禮考證)』을 지어 송시열(宋時烈)이 정한 기복제(朞服制)를 강하게 부인하고 최소한 3년 복상(服喪)은 해야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길임을 주장하였다

역학에도 조예가 깊어 「상수소설(象數小說)」, 「유권옹역도해(柳倦翁易圖解)」, 「선천도총론(先天圖總論)」,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등의 글을 지었다.

문집으로 『졸재집(拙齋集)』이 있다.